차창룡의 "인도신화기행"

922
[내가 본 인도영화 18] 나도 바다를 볼 수 있어요, <불 Fire>(1996) *수정본
차창룡    

'인도철학'의 레포트로 이 영화 감상문을 냈습니다.

레포트로 쓴 것이기 때문에 좀 딱딱한 편이긴 하지만,

참조하실 분에게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바다를 볼 수 있어요

-디파 메흐타 감독의 영화 「불」을 보고






















‘전통적 가치’/‘남성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여성적 가치’의 충돌

디파 메흐타(Deepa Mehta) 감독의 영화 「불(Fire)」(1996)은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충돌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메흐타 감독의 ‘요소(Elements)’ 3부작은 모두 문제의식이 뚜렷한 작품이지만, 「불」은 특히 보수적인 인도 사회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동성애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인도에서 상영 금지되었고, 영화를 상영한 영화관이 테러당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인도인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산스크리트로 puruṣārtha라고 부르는 이 기본적인 가치는 크게 dharma(다르마), artha(아르타), kāma(카마), mokṣa(목샤) 등으로 분류된다. dharma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정확하게 번역하기 힘들지만 개인과 사회의 보호와 유지에 필수적인 의무, 정의 또는 온당한 행위의 규칙과 행동지침을 뜻한다. artha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직업이나 재물, 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수단을 포괄한다. 다르마와 아르타는 원칙적으로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은 아니다. 목적에 가까운 것은 카마와 목샤이다. 다시 말해 쾌락을 위해 물질적 수단을 간구하는 것이요, 목샤를 위해 다르마를 실천하는 것이다. 목샤는 근본적인 자유를 얻는 것이요, 참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영화 「불」에서는 이들 네 가치가 모두 충돌을 일으킨다. 아쇼크가 중시하는 가치는 목샤인데, 그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목샤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의 동생 잔티는 아르타와 카마를 동시에 추구하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정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르마를 저버리고 목샤는 안중에도 없다. 아쇼크의 아내 라다와 잔티의 아내 시타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오직 다르마만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다의 다르마는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살림을 잘하면서 남편이 목샤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다. 갓 결혼한 새댁인 시타의 다르마는 아이를 낳는 것이다.

다르마와 아르타가 주로 수단에 해당하는 가치이고, 카마와 목샤가 주로 목적에 해당하는 가치라면, 남성들은 목적에 해당하는 가치를 주로 추구하는 반면, 여성들은 수단에 해당하는 가치를 강요받는다. 왜 여성들은 카마나 목샤를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필자는 남성들만이 카마와 목샤를 추구하는 것을 남성적 가치이자 전통적 가치로, 여성들도 카마와 목샤를 추구하는 것을 여성적 가치이자 현대적 가치로 분류해보았다. 그것이 인도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가고 있는 역사적 흐름이기 때문이다.


신화 속 여인이 아닌 현대의 여인 라다와 시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라다와 시타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라다와 시타의 욕망이자 그들의 자아다. 라다는 비슈누의 여덟번째 화신인 크리슈나의 애인이고, 시타는 비슈누의 일곱번째 화신인 라마의 아내이다. 시타가 정숙한 여인을 상징한다면, 라다는 다정한 연인을 상징한다고 할까? 그렇다고 주인공들의 성격이 신화 속 시타와 라다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이름이 담고 있는 신화적 인물들의 성격이 투영되었다고는 볼 수 있겠다. 이 영화는 현대의 인도 여인 라다와 시타가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라마야나󰡕에서 라마의 아내 시타는 악마 라바나에게 납치되어 오랜 동안 라바나의 왕국인 랑카(오늘날 스리랑카)에서 보내게 된다. 라마는 아내를 구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펼친 결과 원숭이 하누만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라바나를 물리치고 아내를 구한다. 영화에서는 아내를 구한 다음이 문제가 된다. 아내를 구했지만, 오랫동안 적장의 집에 유배되어 있었으니 아내의 정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시타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불 속으로 뛰어들어도 불의 신 아그니의 보호 아래 그녀가 무사하다면 그녀는 순결한 것이고, 순결하지 않다면 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불 속에 뛰어들었지만 시타는 무사했다. 그녀의 순결이 증명되었음에도 시타는 의심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숲으로 유배되게 된다는 이야기가 영화 속의 극에서 상연된다.

현대의 여인 라다와 시타는 어떻게 살았을까? 영화 속에서 라다는 아쇼크의 아내로 시어머니인 비지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효부에 해당한다. 아쇼크는 종교인에 가까운 이로 금욕적인 삶을 사는 건실한 힌두교인이다. 라다는 난소에 난자가 없어서 아기를 갖지 못한다. 힌두교인들에게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내는 소박맞아도 싸지만, 정신적인 가치를 중히 여기는 아쇼크는 그런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만 금욕을 실천하기 위해 아내의 욕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두 사람이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남편의 금욕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실험에 불과했다.

아쇼크의 동생 잔티는 형과는 달리 성적인 욕망이 강했다. 그러나 아내 시타보다는 정부인 줄리를 더 사랑했다. 아내 시타와의 관계는 의무적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편으로부터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시타는 정신적으로 의존하던 동서 라다에게 육체적인 매력까지 느끼게 된다. 라다와 시타는 결국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불의 심판으로부터 해방된 여인들

어느 날 아쇼크는 하인 문두의 제보로 라다와 시타의 관계를 알게 된다. 라다와 시타는 이 집에서 더이상 살 수 없음을 알고 함께 떠나기로 한다. 마침 비가 오는 밤 시타는 니자무딘 역의 사당에서 라다를 기다린다. 라다는 남편 아쇼크에게 통보한 후 같은 장소에 오기로 했다.

아쇼크는 라다를 설득하려 한다. “욕망은 신에게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오. 욕망은 진리에 의해 제거될 수 있소. 스와미지(아쇼크의 스승)의 도움을 받읍시다.”

그러나 라다는 말한다. “나는 이제야 나의 존재 이유를 알았어요. 욕망 없이 나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시타를 통해서 나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어요. 그녀의 온기가 나의 삶에 어떤 원기를 불어넣어주는지 확인했어요.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였어요.”

격분한 아쇼크가 라다를 밀치자, 가스불이 라다의 치마에 옮겨붙었다. 그렇게 불이 타오르면서,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온 유채밭 장면이 다시 나온다. “엄마, 바다를 보고 싶어요.” “라다, 눈을 가만히 뜨고 보렴. 바다가 보일 거야.” “엄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이것은 과거의 대화였다. 영화가 끝나가면서 펼쳐지는 유채밭에서 소녀 라다는 말한다. “나도 볼 수 있어요. 바다가 보여요. 나도 바다를 볼 수 있어요.”

라다의 몸에 불이 붙는 순간 필자는 라다가 불에 타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라다는 무사했다. 불의 심판에서 무사했다는 것은 라다가 죄가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기진맥진한 채로 라다는 니자무딘 역의 사당으로 간다. 기다림에 지쳤던 시타가 그녀를 껴안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나도 바다를 볼 수 있어요” - 다르마와 카마 사이에서

어린 시절, 우리는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서울에 가고 싶다. 시골 사람들의 꿈이었다. 내륙지방 사람들은 저 멀리 바다를 꿈꾸었다. 이 영화 속에 꿈처럼 등장하는 단어, 그것은 바다이다. 서울이나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세계’라고 하면 될까? 이 영화에서의 이상세계는 무엇일까? 소녀 라다가 마침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가 무지(avidyā)로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바는 ‘목샤’라고 해도 될 것이고, 목샤의 세계가 곧 이상세계가 될 것이다.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것은 목샤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바로 아는 그 자리에 있음을 말한다.

라다와 시타의 입장에서 다르마는 전통적 가치이고 카마는 현대적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그녀들은 일종의 ‘카마’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찾았다. ‘카마’야말로 전통이나 사회나 가정이 강요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카마는 목샤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렇다면 그로 인해 그들은 곧바로 행복해졌을까?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설사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불행하게 살더라도 그것이 꼭 불행인 것은 아닐 터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가? 정답은 없다. 영화 속의 아쇼크와 잔티와 라다와 시타가 함께 살던 모습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말했듯이 우리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남들이 모두 성공하기를 원하니 나도 성공하기를 원하고, 남들이 일류대학 가기를 원하니 나도 일류대학 가기를 원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지금 ‘남들처럼’ 사는 것이 무난한 삶이요 무난한 삶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뛰쳐나온 라다와 시타는 일차적으로 옳은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자유(바다)를 찾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야 그들은 남이 강요하는 가치가 아닌 자신들이 좇아야 할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빛나 2011.12.18. 6:06 pm 

저도 이 영화를 보았어요... 정말이지 공감을 많이 했었지요.
earth는 아직인데 궁금합니다.

차창룡 2011.12.21. 1:30 pm 

  금빛나씨, 오랜만이군요. 지난번 전화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 연말 잘 마무리하시고 건강 잘 챙기시고, 새해에도 좋은 공연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Earth 보시게 되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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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룡 - 시인/문학평론가. 196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저서 『인도신화기행』 등을 펴냈으며, 1994년 첫 시집으로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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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
41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6] 힌두교 시대의 신 23. 하늘에서 내려온 강 갠지스(1)
896
40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5] 힌두교 시대의 신 22. 참혹할 정도로 무서운 여신, 검은 피부의 칼리
841
39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4] 힌두교 시대의 신 21. 악마 마히샤를 무찌른 용감한 여신 두르가
799
38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3] 힌두교 시대의 신 20. 코끼리 머리를 한 귀여운 신 가네샤
1129
37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2] 힌두교 시대의 신 19. 전쟁의 신 카르티케야의 탄생
801
36
2010.02.19.
[인도신화개관 31] 힌두교 시대의 신 18. 쉬바와 파르바티의 사랑과 결혼 [2]
1018
35
2010.02.13.
[인도신화개관 30] 힌두교 시대의 신 17. ‘사티 의식’(남편이 죽으면 부인을 같이 화장하는 의식)의… [4]
1494
34
2010.02.13.
[인도신화개관 29] 힌두교 시대의 신 16. 가장 인기 있는 신, 파괴의 신 쉬바 [2]
1075
33
2010.02.13.
[인도신화개관 28] 힌두교 시대의 신 15. 남근 모양의 링가가 신앙의 대상이 된 이유는?
1002
32
2010.02.13.
[인도신화개관 27] 힌두교 시대의 신 14. 엘로라 16굴에서 만난 파괴의 신 쉬바
1046
31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6] 힌두교 시대의 신 13.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크리슈나
1078
30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5] 힌두교 시대의 신 12. 용감한 무사의 난폭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1]
1138
29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4] 힌두교 시대의 신 11. 사랑스럽고 귀여운 신 크리슈나와 악마 칸샤의 죽음
1025
28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3] 힌두교 시대의 신 10. 인도인의 이상형 라마
1136
27
2010.01.25.
[인도신화개관 22] 힌두교 시대의 신 9. 비쉬누의 화신 아바타 [5]
1453
26
2010.01.11.
[인도신화개관 21] 힌두교 시대의 신 8. 불사의 감로수 암리타를 둘러싼 신과 악마의 싸움 [3]
1020
25
2010.01.11.
[인도신화개관 20] 힌두교 시대의 신 7. 해결사 비쉬누와 젖의 바다
1036
24
2010.01.06.
[인도신화개관 19] 힌두교 시대의 신 6. 우다이푸르에서 만난 유지의 신
차창룡 저 <인도신화기행>(북하우스, 2007)
1176
23
2010.01.03.
[인도신화개관 18] 힌두교 시대의 신 5. 브라흐마의 아내 사비트리의 저주 [1]
차창룡 지음, <인도신화기행>(북하우스)
969
22
2009.12.21.
[인도신화개관 17] 힌두교 시대의 신 4. 인류의 조상 마누와 비슈누의 첫번째 화신 물고기 마츠야 [5]
999
21
2009.12.14.
[인도신화개관 16] 힌두교 시대의 신 3.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만든 푸쉬카르의 성스러운 호수
1234
20
2009.12.07.
[인도신화개관 15] 힌두교 시대의 신 2.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탄생
1272
19
2009.11.26.
[인도신화개관 14] 힌두교 시대의 신 1. 추상적인 신(브라흐만)의 인격화 [2]
1351
18
2009.11.26.
[인도신화개관 13] 유일신 브라흐만과 내 안의 신 아트만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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