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룡의 "인도신화기행"

969
[인도신화개관 18] 힌두교 시대의 신 5. 브라흐마의 아내 사비트리의 저주
차창룡    

 

사비트리는 브라흐마의 아내이자 지혜와 학문의 여신인 사라스바티의 다른 이름이다. 사라스바티는 베다의 어머니이고, 산스크리트 문자인 데바나가리(신들의 문자)의 창시자이며, 신성한 강이기도 하다. 지하로 지하로 흐르다가 알라하바드에서 야무나 강과 함께 갠지스 강에 합쳐진다. 사라스바티는 가야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떤 문헌에는 사비트리와 가야트리가 다른 인물로 나오기도 한다.

 

인도 신화를 읽다 보면 이상한 장면을 만나게 된다. 이 우주에서 최고의 신들조차도 희생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도의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므로 요가와 고행을 통해 수련해야 함은 물론 희생제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계속해서 배가시켜야 한다.

 

어느 날 브라흐마와 사비트리는 신들과 성자들과 더불어 희생제를 올리려고 하였다. 희생제를 위한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희생제를 거행하는 날, 브라흐마는 일찌감치 희생제가 열릴 장소에 가서 준비하고 있었지만, 사비트리는 집안일 때문에 제 시간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제사장이 그녀를 즉시 불러오도록 했다. 그러자 사비트리는 짜증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알지 않느냐? 또한 락쉬미(비쉬누의 부인), 인드라니(인드라의 부인) 등 다른 신들의 부인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내게도 더 시간을 달라.”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세계에서나 신의 세계에서나 가정주부란 할 일이 많았었나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사장은 브라흐마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 희생제는 제주의 부인이 참석하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비트리는 늑장을 부리며 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브라흐마는 사비트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는 인드라에게 명하여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짝을 구해오도록 했다. 인드라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갔다. 어느 골목에서 우유항아리를 이고 오는 우유 짜는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녀의 이름은 가야트리였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용모를 보고 인드라는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희생제가 거행되는 장소로 되돌아왔다. 브라흐마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했다. 그는 희생제에 모인 신들과 성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비트리는 이미 나를 배반했다. 이제부터 나는 이 여인 가야트리를 나의 새로운 아내로 맞이할 것이다. 가야트리가 사비트리를 대신하여 베다의 어머니이자 지혜와 학문의 여신이 될 것이다.”

그때 사비트리가 그 장소에 나타났다. 자신의 자리에 아름다운 낯선 처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분노하여 거기에 참석한 비쉬누와 인드라, 쉬바 등 모든 신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특히 브라흐마에게는 딱 한 곳만 빼고는 어떠한 장소에서도 숭배받을 수 없으리라는 저주를 내렸다.

 

어떻게 최고의 신들에게 저주를 퍼부어 벌을 내릴 수 있었는지 아리송한 일이지만, 사비트리 역시 요가 수행자였으니, 그동안 고행했던 공력으로 뿜어내는 저주의 폭발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인도 신화에서 수행자의 저주는 어떠한 위대한 신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그 저주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아직까지도 브라흐마를 주신으로 모신 사원은 푸쉬카르의 브라흐마 사원 하나밖에는 없다.

 

우리는 사비트리의 저주가 그녀의 아름다운 젖가슴처럼 솟아 있는 산 위를 향해 계단을 올랐다. 계단 하나하나를 오를 때마다 천상에 있는 사비트리의 집이 가까워졌고, 뒤로는 성스러운 호수의 전모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이곳에는 가시로 갑옷을 입은 조그마한 나무들이 많다. 사방이 모래와 바위뿐인 곳에서 나무는 용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사비트리의 저주의 힘으로 나무들은 무수한 가시를 사방으로 뻗으며, 아직까지도 세상을, 특히 쉽게 변심하는 남성의 세계를 감시하고 있다. 남자들이여, 사비트리의 가시를 조심하라, 아니 스스로의 가시를 조심하라. 자기 자신에게 이미 운명의 풍선을 터뜨릴 가시가 있는 법이니.

 

사막에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나무들도 스스로 독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나무들도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계발해온 것일 터, 가시가 무딘 나무들은 벌거벗은 채 가지 사이로 바람을 내보내고 있다.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야말로 사비트리의 마음처럼 시퍼렇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사비트리의 사원이 있다. 순결을 상징하는 백조를 타고 있는 사비트리는 한 손에는 꽃을,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이토록 순하게 생긴 여신이 인도의 최고신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사비트리는 원래 브라흐마가 창조한 딸이었으나, 브라흐마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결코 근친상간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창조라는 우주적인 소임을 함께 수행하기 위해 브라흐마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는데, 결국 그런 남편이 자신을 배반했으니 그녀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 사원은 사비트리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사원 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기를 들고 들어갔더니, 지키는 사람이 눈알을 부라린다. 사진은 절대 금지고, 실내에서는 사진기를 가방에 집어넣어야 하며, 우리들이 사원 앞에서 내부를 향해 사진을 찍은 것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 모습은 절대 찍히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마치 분노한 사비트리처럼 무서운 그의 시선을 뒤통수에 달고 우리는 얼른 신전에서 물러나야 했다. 기부금을 내려던 생각도 쏙 들어가버렸다. 우리가 아니어도 사비트리는 수많은 인도인들에게 충분히 위로받았을 것이다. 아니 사비트리는 궁극적으로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이미 저주를 통해 그녀는 모든 위로를 받았다. 그녀 또한 여신의 자리로 돌아와 가야트리와 화해하고 다른 신들과도 화해했으니, 결국 사비트리와 가야트리는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비트리는 처음부터 용서하지 않고 온갖 저주를 퍼붓고 나서야 화해했나? 그것은 어쩌면 브라흐마가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 악마들을 창조하고, 그 악마들이 철저한 고행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에 응답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도의 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의 말대로 “세계는 자기 파괴에 의해서 자기를 완성시킨다”(허우성 옮김, <인도인의 인생관>, 서광사, 1994, 65쪽)는 것이 인도인, 그리고 인도 신화의 세계관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수많은 고행을 통하여 더넘스러운 역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중요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인도인의 기본 관념이다. 인도 신화는 역경을 스스로 자초하는 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또 그것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신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그리하여 결코 완전무결한 능력을 갖춘 신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자신의 신들을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

 



(차창룡 지음, <인도신화기행>(북하우스))

                       

은기사 2010.01.04. 4:15 am 

인도의 신들은 인간적이네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이 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건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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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룡 - 시인/문학평론가. 196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며, 1989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했다.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저서 『인도신화기행』 등을 펴냈으며, 1994년 첫 시집으로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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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4] 힌두교 시대의 신 11. 사랑스럽고 귀여운 신 크리슈나와 악마 칸샤의 죽음
1026
28
2010.02.09.
[인도신화개관 23] 힌두교 시대의 신 10. 인도인의 이상형 라마
1137
27
2010.01.25.
[인도신화개관 22] 힌두교 시대의 신 9. 비쉬누의 화신 아바타 [5]
1459
26
2010.01.11.
[인도신화개관 21] 힌두교 시대의 신 8. 불사의 감로수 암리타를 둘러싼 신과 악마의 싸움 [3]
1023
25
2010.01.11.
[인도신화개관 20] 힌두교 시대의 신 7. 해결사 비쉬누와 젖의 바다
1036
24
2010.01.06.
[인도신화개관 19] 힌두교 시대의 신 6. 우다이푸르에서 만난 유지의 신
차창룡 저 <인도신화기행>(북하우스, 2007)
1180
2010.01.03.
[인도신화개관 18] 힌두교 시대의 신 5. 브라흐마의 아내 사비트리의 저주 [1]
차창룡 지음, <인도신화기행>(북하우스)
970
22
2009.12.21.
[인도신화개관 17] 힌두교 시대의 신 4. 인류의 조상 마누와 비슈누의 첫번째 화신 물고기 마츠야 [5]
1001
21
2009.12.14.
[인도신화개관 16] 힌두교 시대의 신 3.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만든 푸쉬카르의 성스러운 호수
1235
20
2009.12.07.
[인도신화개관 15] 힌두교 시대의 신 2.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탄생
1276
19
2009.11.26.
[인도신화개관 14] 힌두교 시대의 신 1. 추상적인 신(브라흐만)의 인격화 [2]
1353
18
2009.11.26.
[인도신화개관 13] 유일신 브라흐만과 내 안의 신 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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