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인도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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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시편] 두고 온 신발
김태형    

 

두고 온 신발

 

김태형

 

 

살림살이 다 내놔봐야 작은 나무상자 하나뿐이라는 듯

헌신 깁는 사내가 언덕 위에 앉아 있다

손으로 한 땀씩 꿰매고 있는 낡은 신발을 본다

끈 떨어진 신발을 여기까지 들고 왔다

비좁은 신발장 구석에서

몇 계절 냄새마저 다 빠진 샌들 한 짝

이 먼 힌두사원 앞까지 싸들고 왔다

떨어진 끈 하나 고치는데

이곳저곳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제는 버려도 될 만한 신발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고치고야 마는

나도 참 궁벽하지만

뭐라도 하나 고쳤다는 게 어딘가

신고 갔던 슬리퍼는 이제 필요 없다고 하자

언덕 위의 사내는 흔쾌히 거두어갔다

다음날 그의 나무상자 앞에

내 슬리퍼가 한 짝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옆에서 맨발인 채 자고 있던 아이에게는

너무 크고 헐렁하겠지만

또 굳이 신고 다녀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저 슬리퍼를 신고서 앉아 있을 것이다

검은 진흙으로 질척한 언덕 아래를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잠시 두고 온 것만 같다

어디선가 지친 몸 쭈그리고 앉아서

길 가다 말고 다시 신고 있어야 할 그 슬리퍼는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차창룡 2010.02.09. 8:13 pm 

역시 좋은 시! 앗, 내 발이 보이네. 서정주의 <신발> 이후 신발에 관한 좋은 시 발견했다.

김태형 2010.02.16. 1:48 am 

그 아래 슬리퍼가 바로 제가 두고 온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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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 시인.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에 7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민음사, 1995),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문학동네, 2004), 『코끼리 주파수』(창비,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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