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나의 "chitr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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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나는 이렇게 만났다 >> - 석류와 어머니
금빛나  

 

                                                                                                                                 < 금빛나의 인도 생활>

 

 

 

내가 살고 있는 오리사주 부버네슈어러의 과일 가게의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인도의 남쪽으로 갈수록 또는 대도시로 갈수록 과일의 종류는 다양해진다. 그곳에선 우리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리고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매우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갖가지 열대 과일들이 과일 가게 한가득 진열되어 있다. 비교적 북쪽에 위치한데다 대도시도 아닌 부버네슈어러의 과일 가게에선 사과, 귤, 포도, 배, 파인애플, 바나나 등을 볼 수 있다. 가격은 한국보다 저렴하지만 품질은 그리 좋은 편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망고는 제 철에만 잠시 나왔다 반짝 성황을 이루고는 들어간다. 이런 과일 가게 형편에서 내가 특별히 잘 챙겨먹는 과일이 두 가지 있다. 석류와 파파야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현지 과일인데다, 몸에 각별히 좋다는 붉은 색소가 들어간 과일이므로. 파파야는 숭숭 썰어 먹는다. 하지만 씹는 것보다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 나는, 매일 아침마다 석류 두세 개를 믹서기에 갈아 주스를 만들어 마신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이다.

 

어렸을 적 언젠가 석류를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반을 가르니 신비롭게 터져나오던 붉은 루비 조각들! 햇살을 받아 신비하게 반짝이던 알알의 작은 조각들은, 그러나 곧 잊혀졌다. 그 후로는 딱히 석류를 만난 적이 없으므로. 그리고… 거의 20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어머니가 들고 오신 석류 주스를 통해 다시 석류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 건.

 

그 무렵 어머니는 갱년기라는 시기를 맞았다. 집안 식구들 모두 잘 알지 못하던 단어였다. 어머니 본인조차도 딱히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지는 않았다. 여하튼 폐경은 어머니를 찾아왔고 여성 호르몬의 감소와 더불어 몸에 여러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더위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거기 선풍기 좀 켜봐라”, “이쪽으로, 그래, 더 세게”라고 하셨다가도 곧바로 선풍기를 꺼달라고 하셨다. 그때는 여름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머니의 더위를 위해 각 방마다 선풍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현상은 주무실 때도, 식사를 하실 때도, 아무 때나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덥다고 하시니 다만 선풍기를 꺼내 놓았을 뿐, 그 이상의 특별한 도움은 없었다. 갱년기. 지금껏 살아오면서 직접적으로 또는 주변에서라도 겪어본 적 없는 현상이었기에 가족 모두 무지했고, 몸의 변화이긴 변화이지만 딱히 병이 아니며 앓아눕는 것도 아니므로 그다지 관심을 크게 쏟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두 번씩 정기적으로 모여 그동안의 대소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데, 그 자리에서 서로 섭섭했던 점이나 고칠 점 등을 말하기도 한다. 이른바, 가족회의이다. 그 밤에도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이 모두 모였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 어머니가 동생과 나를 보시며 어머니에 대한 몇 가지 행동을 지적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하셨다.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어머니의 속이 다 뒤집어져 나와 우리 앞에서 엉엉 우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외치셨다.

 

                                                            “나도 사랑받고 싶어…”

 

아… 이 무슨 말인가… 무슨 표현이 이렇단 말인가. 이것이 내 어머니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나머지 셋은 그 앞에서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가다듬으신 어머니는, 조금 쑥스러워 하시며 다시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 후였을 것이다. 냉장고에서 석류 주스를 보게 된 것은. 이게 뭐냐고 묻자, 갱년기에 좋은 음식이라 한다며 사오셨다 했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의 갱년기를 위해 석류 주스를 또는 다른 음식을 특별히 사다 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갱년기에 좋은 과일, 석류라…’하며 가끔씩 냉장고에서 어머니의 주스를 꺼내 맛을 보고는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갱년기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어느 사이엔가 막을 내렸다.

 

 

인도에서 석류의 얼굴을 매일같이 대면하게 되자, 이상하게도, 철없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씩 떠오르게 되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식은땀 흘리시던 어머니의 모습, 선풍기를 어머니 쪽으로 돌리라 말씀하시며 보이시던 힘든 표정, 그리고 그날 밤의 고백과 수줍어하시던 모습, 친구에게서 들으셨는지 이모에게서 들으셨는지 석류 주스를 직접 사들고 들어오시는 모습 등등이 석류를 보면 거울에 비치듯 환히 보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왜 그랬는지, 왜 그리도 무심하고, 왜 그리도 어리고, 왜 그리도 못났던지…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무관심에 대해 섭섭함을 그날 밤 딱 한 번 드러내셨을 뿐, 그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어머니의 갱년기에 대한 식구들의 미온한 도움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셨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혼자 있어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이, 둘이 있을 때 외로운 거라던데… 내 어머니는 남편, 딸, 아들을 두고도 홀로셨다.

 

인도서 여자 나이를 홀로 보내고 있는 지금, 그때 처절했을 어머니의 외로움과 돼먹지 않았던 딸년의 몰이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헝클어진 머릴 쥐어뜯으며 후회한다. 앉아있다가도 그것만 떠올리면 금세 눈가에 눈물이 성그렁 성그렁 맺힌다.

 

 

어머니는 당신에게도 낯설기만 하던 갱년기의 겨울을 홀로 이겨내고 새로운 시즌의 활력과 생기를 되찾으셨다. 내 한 몸 위해 날마다 석류 주스를 부지런히 마시고 있는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어머니를 위해 주스를 만들어 드려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는 한다. 그러나, 고독 끝에 새로운 부활을 맞은 자에게 지금 와서 석류 주스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겨울 뒤엔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온다지만, 이제 내 어머니의 갱년기는 끝이 났고 너무 늦게 깨달은 딸의 석류 주스도 더 이상은 필요가 없다. 그래도 참회의 눈물 몇 방울 섞어 석류 주스를 드리면 어머니는 그것도 기특해 하시며 받아주시겠지…

 

나와 같은 후회가 줄어들길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더 많은 딸들과 아들들과 남편들이, 나이에 이르러 맞게 되는 어머니와 부인의 갱년기를 더욱 따뜻하게 이해하고, 더욱 많은 도움을 주기 바라며 이 글을 쓴다.

그리고, 갱년기마저도 꿋꿋하게 넘겨내며 젊은 나에게 그것의 도래와 고통과 도약을 몸소 보여주신 내 어머니께 이 글을 드린다. 못난 딸자식, 석류 주스 대신 이 글을 드린다.

 

 

 

 


                       

은기사 2009.10.25. 2:57 am 

이제 석류를 보면 빛나 씨 글이 떠오르겠네요. 진솔한 글 잘 읽었어요. 감동적이에요.

차창룡 2009.10.25. 4:42 pm 

와, 나도 눈물이 나오네요.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후회, 통곡만으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후회로 가슴이 미어질 때 나오는 눈물입니다.

보물섬 2009.10.31. 12:36 pm 

빛나씨, 아름다운 글이에요.

조명 2010.01.25. 6:24 am 

왜 이렇게 마음이 아려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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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나 - 인도고전무용가. 2005년 오리사주(Orissa)의 꼬나르꺼(Konark)에서 오디시에 입문했다. 현재 인도에서 오디시의 거장 뻐드머스리 구루 겅가더러 쁘러던(Padmashree Guru Gangadhar Pradhan)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꼬나르꺼 댄스 앤 뮤직 페스티발(2006, 그룹 공연), 미쯔비시-인디아(2007, 트리오 공연) 오디시 공연(2009, 솔로 공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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