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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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11월) . . . 김현식, '나'와 '또 다른 나' 사이를 건너가는 사랑의 곡예사
보물섬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김현식, '나'와 '또 다른 나'사이를 건너가는 사랑의 곡예사

 

   십일월이면 나는 예전에 내가 내 몸처럼 아끼고 좋아하던 노래나 책들을 하나하나씩 떠올리며 걷잡을 수 없는 상념 속으로 빠져든다. 그 노래의 앞쪽에는 헤리 베라폰테가 1967년 가을 카네기홀 실황공연에서 고즈넉하게 부른 <대니 보이>와 오구리 고헤이 감독의 영화 ‘잠자는 남자’ 속의 한 장면, 스탠드바의 한 구석에서 여가수의 음성을 통해 흘러나오던 바바라 보니의 <솔베이지의 노래> 그리고 오욕으로 얼룩진 그리스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굴곡을 한없이 깊은 슬픔의 정서로 승화시킨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그리스 가곡들이 있다.

 

   책의 뒷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것은 피츠제럴드가 영역한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와 프랑시스 잠의 전원 시편들, 한 줄 한 줄 읽고 있노라면 입가에 저절로 행복한 웃음이 번지는 쟝 꼭도나 자끄 프레베르의 시들이다. 한 때는 잠 못 이루던 그 숱한 밤들을 말없이 내 곁에서 지켜주던 오 헨리의 단편집이나 체호프의 희곡들 속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 찰스 램의 굴뚝청소부들에게도 나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그것 말고도 또 내가 빚지고 있는 것은 . . . 무수히 많은 책들과 노래들이다. 나는, 나라는 인간은, 이 땅위에 발을 붙이고 사는 실존적인 한 개체로서의 나는 언제부터 그 많은 노래와 책에 내 살의 한 점을 떼어주었던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칭칭 묶인 그들과 나의 인연의 시작이 어쩌면 그리도 기구하였던가.    



 +오오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있는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를 불러다오+

  - 셰익스피어, <리어왕> 중에서 


   ‘나’를 생각한다. 이 세상으로 오기 전의 나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언젠가는 다음 세상으로 옮겨갈 나, 나의 전생과 내세를 그려본다. 나는 어떻게 저곳도 그곳도 아닌 이곳으로 오게 됐을까. 그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것은 나의 의지인가 신의 선택인가. 나는 하나지만 경우에 따라서 둘이거나 셋,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나의 역할은 무한증식을 꿈꾸는 아메바의 단순세포처럼 밑도 끝도 없다. 나의 유전자는 아버지의 성기를 떠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잡종교배 됐다. 아버지의 성을 부정하고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나의 피는 더럽고 불순하다. 내 몸 안엔 양성구유(兩性具有)의 안드로규노스(Androgynous)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하다. 에드먼드 헥켈의 법칙이 이를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둡고 축축한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그 바다는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동요 <따오기>에 나오는 해뜨는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출생지는 바닷가의 항구였지만 정작 내가 성장한 곳은 탄광이 있는 산이었다. 그곳의 비릿한 습기와 매캐한 바람이 나를 키웠을 것이다. 생선의 배를 갈라 거기서 나온 알과 창자로 하루하루의 생계를 힘겹게 연명하는 가난한 촌부들과 지하 수 천 미터의 막장에서 캐어 올린 시커먼 석탄의 힘으로 일상을 겨우겨우 버텨나갔던 뜨내기 광부들이 나의 정겨운 이웃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공부했다. 그곳의 산과 바다가 이를테면 나의 정신적 고향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고향을 떠나왔다. 고향을 떠나 낯선 타지에서 글을 쓰겠다는 핑계로 하릴없이 떠돈 지 십 년이 다 된 지금의 나는 말 그대로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그저 추수가 다 끝난 빈 들녘의 쓸쓸한 언덕에 무심하게 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흘러가고 흘러가서 내 안에 숨어있던 열정이 모조리 소진할 때까지, 나의 혈연과 나의 지연과 나의 학연은 내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나를 규정하고 함부로 재단하며 맘대로 등급을 매겨버리는 그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꼬리표는 나의 굴레이자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는 정체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의 피를 받았고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슨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는가보다는 현재 나는 어떠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나 이외의 사회나 국가나 민족, 더 나아가 세계와 우주에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지 명징하게 성찰할 수 있을 때만이 한 개인의 정체성은 비로소 번데기의 허물을 훌훌 벗어버리고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와 주인의 자손들이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한 자리에 앉는 꿈입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모든 거친 들판이 평지가 되고 모든 굽은 곳이 펴지는 그런 꿈입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네 아들딸이 언젠가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에 의해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는 꿈입니다.+

  - 마틴 루터 킹, <워싱턴 D. C 링컨 기념관 앞 연설(1963)>에서


   내 인식의 한계, 정체성의 폭과 너비를 확장시켜 준 대학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이로든 내게 있어 전혀 쓸모없는 무용지물은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도저한 허무 속에서  그래도 내 희미하고 몽롱한 의식의 한복판을 심장을 동경하는 탄환 같은 불화살이 되어 관통했던 몇몇 교양강의 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종교적 수사로 인종 차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폭력적인 인권운동의 선두에 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선택과 해석임을 강조했던 E. H 카, 노동 행위 자체가 소외의 한 양상임을 깨닫고 그로부터의 실천적 자유를 주창했던 에리히 프롬, 신성하고 자유로운 성의 체계 속에 숨어있는 파시즘적 요소를 날카롭게 지적했던 빌헬름 라이히와 이 땅위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부당한 일인지를 만천하에 폭로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끝에 정신병리학자 출신의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의 전사 프란츠 파농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흑인 정체성 회복운동(네그리튀드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반식민주의자였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교과서로 불리는 프란츠 파농의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언어 문제를 다룬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제 3세계 국가들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일종의 묵시록과 같은 것이었다. 그 책을 받아든 순간의 충격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파농을 두고 “제 3세계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고 천명한 바 있다.

 

   파농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무산자들의 불가피한 폭력을 옹호했다는 점에선 60년대의 흑인 인권운동을 미국에 국한시켜 흑인 근본주의를 표방한 급진파 지도자 말콤 X의 사상적 뿌리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로부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제 3세계 작가들과 분단국가의 작가들 그리고 미국의 흑인작가들 이를테면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마르께스나 <불볕 속의 사람들>의 저자 가싼 카나파니와 <양철북>의 권터 그라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 불렸던 랭스턴 휴즈와 리차드 라이트, 랠프 앨리슨 그리고 토니 모리슨과 같은 작가들을 하나하나 알아나갔고 마침내 그 고단한 순례의 여정은 그 누구보다 더 우리말과 우리의 사상과 감정의 근원과 본질에 집착했을 재외한국인 작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령 반세기 전 일제 치하의 현실을 뒤로하고 독일로 건너가 활동했던 이미륵이나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 괄목할만한 활약을 보여준 김석범, 이회성, 이양지, 유미리 같은 재일동포 작가들과 영어로 책을 낸 김은국이나 김용익 같은 작가들을 비롯한 재미동포 2세 작가들 말이다.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다시 머나먼 길을 우회하여 나에게로, 나의 근본에게로 돌아오는 여행의 도중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나갔던 그들이야말로 결국은 대학에서 내가 만난 나의 진정한 스승들이었다.



 +쓸쓸한 거리에 나 홀로 앉아 바람의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는 이 내 마음이여+

  - 김현식


   고백하건대, 처음부터 내가 김현식이라는 가수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누군지도 잘 몰랐다. 그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그가 부른 노래를 좋아했을 리 만무하다. 누구누구처럼 중, 고등학교 때부터 음반 가게를 들락거리며 맘에 드는 팝송이나 가수에 심취했던 음악 마니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평소에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프로를 열심히 들었던 것도 아니다.

 

  내가 지니고 있었던 음악적 소양은 기껏해야 학교에서 배웠던 외국의 몇몇 가곡과 민요가 전부였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클래식이든 팝이든 우리나라 가요든 간에 장르를 초월하여 그 방면엔 문외한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외국의 가수는 비틀즈와 밥 딜런, 존 바에즈 그리고 사이먼 앤 가펑클 정도였고 그 나머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김현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를 그 이름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 것은 <별밤>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심야 라디오 교양프로. 아마 별밤을 두고 그렇게 말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 프로의 꾸준한 애청자였으므로. 특히 주말에 내보내던 공개방송과 학생들의 방학에 맞춰 마련됐던 교양강좌는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였다.

 

  정동에 있는 라디오 극장에서 어벙벙한 이문세의 유머와 재치 있는 화술로 진행되던 그 녹화현장에 나도 두서너 번 놀러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추억은 에어컨도 들어오지 않는 문화 체육관 내부에서 몇 번이나 NG를 내며 초기 일요 예술무대의 사회를 맡아보던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때 나는 동해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서울에 갓 올라온 촌뜨기였고 재수생 신분이었다. 별밤 극장이나 매주 월요일 새벽 1시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던 청소년 극장, 그리고 그 무렵 새벽 세시에서 다섯 시까지 음악프로를 담당하던 정혜정 아나운서의 맑고 낭랑한 멘트를 들으며 충정로 부근에 살던 친구의 자취방에서 서로 킬킬거리던 장면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아무튼 그 시절의 나는 별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프로였고 그러한 믿음은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그 후에 자연스럽게 라디오의 음악프로와 멀어지게 되기 전까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의 가치 체계, 자의식의 바로미터였다.

 

   거기서 나는 김현식을 좋아한다는 어떤 여고생으로부터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처음으로 <비처럼 음악처럼>이라는 곡을 알게 됐다. 처음 듣는 그 곡은 무척 낯설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지 그 다음부터는 그가 부른 노래들이 예사롭게 들리지가 않았다. 그의 노래와 나 사이에 일종의 친밀감이랄까 연대의식 같은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탓이었다.

 

  한영애의 음악세계를 얘기할 때 초창기 ‘해바라기’의 한 구성멤버로서의 생활을 빼놓을 수 없듯 김현식을 말할 때 ‘봄여름가을겨울’과의 인연을 건너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한영애와 마찬가지로 김현식 역시 ‘신촌블루스’라는 프로젝트 모임을 거쳐 갔던 경력이 그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봐도 그것이 결코 과장된 수사는 아닐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더 강화되는 그의 내지르는 듯한 샤우팅 창법은 김현식이 전인권으로 상징되는 ‘들국화’ 못지않게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적인 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숨 가쁜 호흡과 거친 음색이 그가 앓고 있던 질병의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단지 그의 몸속을 차츰차츰 갉아먹어 들어가던 몹쓸 병마 탓만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의 노래는 일반적인 록발라드가 아니라 엘라 피츠제럴드나 빌리 할리데이 같은 재즈 보컬리스트처럼 블루스적인 소울에 더 가깝다. 영혼을 울리는 기적의 노래,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의 영성에 호소하는 소울은 박해받는 순교자들을 위한 진혼의 노래이다. 슬픔과 고통의 영가,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처럼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김현식의 방랑과 휴식은 그의 노래가 독기처럼 품고 있는 어떤 한스러움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으리라 짐작해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직전까지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본 가까운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 다녔다고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그로 하여금 외롭고 황량한 밤거리를 헤매게 한 심리적 기제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반쯤은 정신 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미치광이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죽음의 기미를 눈치 채고서도 인간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엄청난 폭음을 일삼을 수 있었을까. 시시각각으로 자신의 몸을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잠시나마 떨쳐버리기 위해서? 아니, 아니다.

 

   그에게도 목숨은 하나였다. 가수가 아니라면 정신병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자아의 괴로운 육성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나’에 관한 정체성이었고 정체성의 결핍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비와 음악의 음유시인 혹은 사랑의 가객으로 부르지만 나는 이제 그를 내 속에 있는 너무 많은 나를 찾아 시작도 끝도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난 한 사람의 외로운 나그네로 명명한다. 

 

   김현식이 생전에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남긴 곡의 레퍼토리는 끝이 없다. 나는 여기서 그 노래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내 힘이 너무 벅차고 숨이 가쁘다. 다만 추억의 옛 책장을 넘기듯, 남몰래 지나간 사진첩을 들추듯 그저 몇 몇 곡을 향해 언제나 변함없는 안타까운 연민의 눈길을 던지며 그 곡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되새김질해 볼뿐이다.

 

  신촌 블루스 시절, 두 팔을 벌리고 마치 대기 속의 영혼과 접신이라도 하듯 혼신의 정열을 쏟아 토해내던 <골목길>과 <떠나가 버렸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룹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했던 <비처럼 음악처럼>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어버렸고 권인하, 강인원과 호흡을 맞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새삼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어찌 잊을 것인가. 유재하의 곡을 다시 편곡하여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음깔로 소화했던 <가리워진 길>과 <그대 내 품에>를, 춥고 배고픈 잠 못 드는 밤마다 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을 달래주던 <우리 처음 만난 날>이나 <추억 만들기>,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사랑할 수 없어>를, 그가 떠난 뒤 동료 가수들의 입을 통해 다시 환생한 <사랑했어요>와 <어둠 그 별빛> 그리고 그 자신의 <넋두리>를. 그러나 그 모든 추억의 노래를 제쳐두고 나는 오히려 그가 사랑의 음유시인처럼 하모니카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떨림을 안은 채 고즈넉하게 연주했던 <한국사람>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보고 싶다.   

 

  이젠 어느덧 그것이 먼 옛날에 있었던 꿈속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멀어졌지만 거리엔 수상한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행인들조차 오싹한 한기를 느껴 목을 움츠리며 집으로, 집으로만 줄달음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하나의 이념이 무너지고 그 이념의 와해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어수선하고 번잡하기만한, 그 무렵의 어느 해 늦가을이었을 것이다. 중심은 무너졌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언가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해 십일월에도 전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은 여의도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를 지지하기 위해 학생들은 또 무리를 지어 한강다리를 건넜으며 전경들은 여지없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집회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화염병과 최루탄 역시 변함없이 허공을 날았다. 그해 십일월엔 전태일 추모제가 청계천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하여 여의도에서 열리는 노동자대회와 동시다발적으로 거리 여기저기서 꽃처럼 피어올랐다.

 

  교내방송국에서 저녁방송을 준비하던 나는 언제나 늘 그랬듯이 그들에 비해 뒷전에 물러나 방관자처럼 구경만 하고 있는 나의 처지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일이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고민 끝에 나는 내가 맡고 있던 음악 프로의 말미에 김현식의 <한국사람>을 집어넣었다.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교정으로 하나 둘 올라오고 있었다. 하모니카의 애수가 적막하고 쓸쓸한 십일월의 교정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부스에 들어가 있던 아나운서의 멘트가 그 곡이 다 끝나갈 무렵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전태일은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정직하게 증언한 이 땅위의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역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의 가슴에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한사람입니다. 김현식, 그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정직하게 걸어간 대중음악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변함없는 한국 사람인 것입니다.”나는 왜 그때 <한국사람>을 내보냈던 걸까.

 

  모르긴 해도 그 행위의 배후엔 김현식이 80년대 초의 어느 순간 음악 현장에서 우연히 김민기를 만났을 때 벌였던 유명한 논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때 김현식이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지점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 반면 김민기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을 강조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도 그들이 나아간 음악세계의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결국 그들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의 정체성이 무언가를 고민했던 진정한 음악인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김현식 사후에 김현식과는 이종사촌의 관계에 있는 김장훈이 조직한 밴드 이름이 <한국사람>인 것은 그런 측면에서 우연 치고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하겠다.

 

 

 +난 긴 의자 위에 누워있었네

  그리고 내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네, 내 인생이라 생각한 것을 

  내 인생, 내 인생에 대해 난 무엇을 알고 있나 +

  - 레이몽 끄노


  그는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외국문학도였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그가 한 문학잡지에 비평가로서의 첫 출발을 알리며 기고한 글은 거울 이미지를 빌려와 존재와 나 사이의 관계를 밝힌 ‘나르시스 이론’이었다. 그의 첫 평론집은 그런 의미에서 <존재와 언어>였고 마지막 유고로 남긴 책에 관한 짤막한 서평은 <행복한 책읽기>라는 이름으로 그의 사후에 그를 스승으로 따르고 존경했던 가까운 제자들에 의해 어두운 서재의 서랍 한구석에서 밝은 세상으로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그의 사상적 편력은 초기엔 프로이드와 융으로 시작해서 가스똥 바슐라르와 질베르 뒤랑을 거쳐갔지만 후기로 갈수록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말라르메나 발레리, 릴케 같은 서양 시인에서 신수와 혜능의 게송과 같은 동양의 선시로 그의 관심이 옮겨간 것도 그러한 사상의 진폭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한다.

 

  그가 후기로 갈수록 초기완 달리 동양 사상이나 일종의 신비주의로 기울었던 까닭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기엔 프랑스 대학생이 꺼냈던 짤막한 유머 하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남북으로 갈라진 변방의 한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과 고뇌의 면면이 응축되어 있다. 비록 외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그가 끊임없이 한국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반응하고자 했던 것은 동료였던 국문학자와 함께 펴낸 <한국문학사>라는 저서에서도, 또 그 자신의 생활의 고백록과도 같은 <한국문학의 위상>이라는 책을 봐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시인이나 작가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여 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몇 안 되는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니, 비평가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성실하고 진지한 독자였다. 자유로운 산문정신에 입각하여 감싸면서 확장해나가는 그의 비평을 가리켜 그리하여 동료들은 공감의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가 살아있을 때 사르트르의 죽음을 두고 “사르트르가 갔다. 그러니, 이제 프랑스 문단은 조금은 쓸쓸해지겠구나.”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을 당시 한겨레신문의 문화부 담당기자였던 고종석은 그의 죽음에 부쳐 “김 현이 죽었다. 이제 한국 문단은 소중한 독자 한 사람을 잃었다. 쓸쓸하다.”라 인용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4.19 세대, 한글세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하며 한국문단의 수많은 시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던 그는 죽어서 자신이 태어난 남도의 한 포구로 돌아갔다. 그의 비명에 새겨진 그를 가리키는 글은 그래서 ‘비로소 바다로 돌아간 거북이’였다. 전통이 있다는 것은 길을 잃고 헤매었을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에 고향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되씹어 볼 수 있다고 그는 자신의 프랑스 유학시절의 일상을 담은 산문집 [김 현 예술기행]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문단에서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는 김 현 말고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윤식이다. 현장을 직접 발로 뛰는 실증주의 비평의 대가로 명성이 높은 그는 그 높은 명성만큼이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달고 다닌다. 시에 김 현이 있었다면 소설엔 김윤식이 있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들 두 거인은 한국 문단을 양분하면서 실재비평의 막중한 소임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지금 김 현은 죽고 김윤식은 건재해 있으니 이 땅의 시인들은 불행한 반면 소설가들은 행복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작가에겐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줄 혜안과 안목이 있는 비평가와의 조우가 크나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문학사방법론서설 - 그 구조적 시도’라는 평론으로 문단에 발을 첫 발을 디딘 그가 일찍부터 화두로 삼고 있었던 것은 한국문학에서의 근대성이라는 지점이었다. 그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김 현과의 공동작업을 벌여나갔고 하버드 옌칭 장학금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동경대학으로 유학하여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의 근저에는 분명 한국문학의 근대성에 관한 해명 없이는 온전하게 한국문학을 연구할 수 없으리라는 다소 절박한 심리적 압박감이 깔려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가 끊임없이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루카치의 글을 인용하고 이광수를 비롯한 일제 시대의 한국의 문인들 이를테면 임화라든가 이상이라든가 염상섭의 삶과 작품세계를 연결지어 탐구해나가는 것 역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때 연구실의 비좁고 쾌쾌한 문을 박차고 나와 훌쩍 중국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 여행의 부산물로 나온 것이 일련의 예술기행 연작이다. 거기엔 느닷없이 북경반점이 등장하는가 하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언급되기도 한다. <도화원기>의 사상과 <몽유도원도>의 사상이 겹쳐지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 클로드 로랭의 <아시스와 갈라테아>가 똑같은 연상의 축에 놓여지며 박수근과 박완서가, 윤흥길과 나카가미 겐지가 한 괄호 안으로 묶이기도 하는 것이다.

 

  김 현이 문학뿐만이 아닌 문화 예술 다방면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의 문학적 감식안을 넓혀갔듯이 김윤식 그도 예외 없이 더 넓은 문학의 대해로 나가기 위해 문학 그 자체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서의 바다가 전남 해남과 경남 진해라는 지명으로 귀결되듯 한국문학사에서의 두 학자의 행보와 그 생애는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충실하게 담아낼 수 있는 한국문학의 올바른 그릇을 만들기 위해 오롯하게 바쳐졌다고 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다 내가 아닌 것은 내가 아니다+

  - 막스 슈티르너


  김현식에서 출발한 나의 정체성,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 김 현과 김윤식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른 곳은 김종태와 박생광의 그림이다. 먼저 김종태의 1929년 작 <노란저고리>를 보자. 이 그림은 후덕하고 어진 한국 여인네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가르마를 타고 빚어 넘긴 머리와 맑고 풍성한 얼굴 표정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하얀 동정과 그 위에 테를 두른 붉은 옷고름, 그 둘을 절묘하게 받쳐주고 있는 저고리의 노란색 바탕에서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다.

 

  왜 하필이면 노란색일까. 노란색이 한민족에게 갖는 상징적 기호란 무엇인가. 색채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정확한 까닭을 알 수 없지만 노란색이 우리의 전통적인 오색 중의 하나임을 감안하여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그건 따뜻하고 자비로운 평화의 기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그 따뜻함과 평화로움은 마치 봄볕을 받으며 양지바른 마당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햇병아리들의 자유로운 한가로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색이 아니라 슬프고 애잔했던 기억과 함께 이미 추억의 깊은 숲 속으로 침잠해버린 과거의 색, 유년의 색이다. 그 색은 한번 지나가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틈 사이로 모래알이 새나가듯 스르륵 빠져나간 그리운 색이다. 나는 그 아쉽고 안타까운 색의 하늘하늘한 질감에 매료된 채 어질머리를 안고 가볍고 옅은 꿈길을 헤매인다. 꿈속에서나마 김종태의 작품 속에 나오는 노란저고리를 입은 한국의 어머니나 누이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다음에 거론될 박생광이야말로 자신의 작품에 투영되는 왜색을 몰아내고 민족적 혼을 찾고자 한평생을 바친 우리 화단의 작은 거인이었다. 타인과의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기기는 원래 쉬운 법이다. 그러나 정작 어렵고 힘든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박생광은 그 외곬의 싸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버림으로써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그 숨 가쁜 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서양식의 원근법이나 기하학적 구도가 아니라 우리의 무속이었다. 형식의 추상성을 버리고 내용의 구체성을 선택한 것이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전통 위에 있다.”는 그의 메모나 그의 그림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십장생이나 호랑이, 단청, 가야금, 고려불은 모두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잘 말해주고 있다.

 

  1983년에 완성된 작품 <무당>을 보면 ‘아! 이것이 정말 한국의 그림이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새어나온다. 거기엔 외국의 잡물이 스며든 흔적이 일절 배제되어 있고 오로지 순수 토종의 민화에서 영감을 얻은 예술혼을 가열차게 붓질한 화가 자신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배어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그림도 서양화 못지않은 강렬한 인상을 관객의 뇌리 속에 심어줄 수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엔 그의 이름 그대로 생생한 빛이 살아 흐른다. 그 선명하고도 예리한 날빛은 이름 그대로 한국인의 빛이다.

 

  김중현의 그림 역시 한국적 미감이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무녀도>나 <주막>, <농악> 같은 작품은 박생광에 비해 좀 더 유하고 부드러울 뿐이지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면에선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 외에도 남 관 같은 화가는 한국의 토속적 색채에 추상성을 가미하여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자기상실의 체험으로서의 슬픔이다. 그것은 서양의 근대를 떠받쳐왔던 중심개념인 욕망의 실현으로서의 자기 확인과는 사뭇 다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삶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함으로 인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모든 것이 존재하는 건 내가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중에서


  20세기 연극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회자되는 이탈리아의 희곡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그의 작품 <작가를 찾아가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 혁명적이면서 동시에 복고적인 한 가족을 등장시켜 그들 가족 성원 개개인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아버지와 딸의 숨겨진 과거와 비정상적인 심리상태를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고 한 것은 그들 가족은 미쳤을 때가 오히려 정상이라는 다소 병리적인 결론이다.

 

  ‘이 세상에 진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불가지론에 빠져있었던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아픔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피란델로 자신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부조리 연극의 대명사 페르난도 아라발과 유진 이오네스코, 그리고 샤무엘 베케트에게도 그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불가해함을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예술이라는 보다 차원 높은 형식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김현식이 음악을 선택한 것도 그리고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한 것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결국은 죽음 뿐. 그러나 그 죽음의 길을 그는 용기 있게 걸어갔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 . .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가시나무새, 시인과 촌장)’ 그렇게 끊임없이 흔들리고,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그가 남기고 간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깨닫는 것은 즐겁다

  즐겁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때문에 두렵다

  두렵다!

  두려움은 괴롭다 괴롭기 때문에 아프다

  나는 언제나 나를 가둔다 울타리 안에

  처음엔 그 울타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넓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도 울타리 안에 있다 내가 스스로 쌓은 울타리 안에

 

    

  “대지는 인간의 요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요람에서만 살 순 없다.”고 우주 로켓 연구의 권위자 K. E. 치오르코프는 말했다. 무언가를 깨닫게 된 사람은 그것을 깨닫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발견의 기쁨 뒤에는 늘 고통과 슬픔이 함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 것이다. 산다는 건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깨우쳐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직시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힘과 용기가 필요할 뿐, 인간은 누구나 그 물결의 모양을 자유롭게 여러 가지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물결 역시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기에.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육상효가 펴낸 김현식 평전 [사랑의 가객 김현식]에서 그는 가수이면서도 처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철저하게 버려진 이단아, 한 마리의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그 들풀처럼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던 반항 정신이 불행한 땅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살다간 고독한 언더그라운더의 풋풋한 매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 거침없는 매력이 예정보다 일찍 그의 생명을 앗아간 주범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그와 불협화음을 내는 반항아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무시무시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 1일 저 세상으로 떠난 김현식의 사후10주기를 기리기 위한 추모 헌정앨범이 생전에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음악 동료들과 후배가수들의 손에 의해 2000년 11월 1일 제작, 발표되었다. 이 음반에는 새로 이은미가 부른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와 사랑과 평화의 ‘겨울 바다’ 그리고 김경호의 재해석에 의한 ‘사랑 사랑 사랑’과 ‘당신의 모습’을 정경화와 조동익이 각각 다른 버전으로 소화한, 기라성 같은 음악인들의 주옥같은 곡들이 실려 있다.

 

  김현식의 곡들은 비단 이번 경우뿐만이 아니라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도 자주 리메이크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있는 한, 한국의 거리 골목 어디에서건 불려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후대에 새롭게 불려질 이 모든 추모곡들을 제쳐두고 김현식 자신이 생전에 직접 부른 그의 오리지널 원곡들을 들으며 그가 꿈꾸었던 한국 사람은 어떤 것일까 곰곰 생각해본다. 물론 거기엔 정답이 없다. 다만 그곳에 ‘수많은 질문들(Questions, by Manfred Mann's Earth Band)'과 그 질문들로부터 '정착하지 못한 여행자(Stationary Traveller, by Camel)'들을 위한 작은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기를 나는 점점 추워지는 겨울의 초입, 이 순간에도 간절히 바랄 뿐이다.


(90매)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11월호)

                       

은기사 2010.02.18. 11:06 pm 

김현식 노래는 지금 들어도 참 황량해요. 비슷한 창법은 많은 것 같은데 역시 진짜 김현식의 목소리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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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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