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1233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4월) . . . 송창식, 자연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 음악인의 초상
보물섬  
 

병든 문명의 시계바늘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 송창식, 자연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 음악인의 초상


 

  1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핀'다거나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이라거나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라는 가곡의 노랫말처럼 그렇게 봄이 왔다. 거짓말처럼 봄이 다시 우리들 곁을 찾아온 것이다.  사월. 패티 김의 ‘사월의 노래’를 입 속으로 흥얼거리며 나는 언젠가 ‘사월은 어떻게 오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습작시를 쓰기도 했었다.

 

사월은 어떻게 오는가 간사한 꽃바람 속에서 희뿌연 황사의 뒷모습을 좇아가는 축축한 봄비의 폭풍 같은 순수함으로 오는가 낡고 후미진 것은 다들 떠나갔다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은 흙먼지 속으로 달아나고 정욕을 품은 여자들의 싱싱한 가슴에선 철 지난 매화 향기만 분분할 뿐 땅속에 잠든 미친 자들의 중얼거림으로 사월은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는가 몸 아픈 자들은 모두 다 일어나 관속으로 들어간다 짐승들은 침을 흘리며 제 짝을 찾아 하루종일 산과 들을 누비고 꽃들은 뚝, 뚝, 뚝 모가지를 꺾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다는 사월의 노래와 함께 궁핍한 시대는 다시 돌아오는가

 

양수리 가는 길에서 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보았다 철쭉과 개나리와 벚꽃이 온 천지를 갈아엎은 세상 희디흰 눈 속같이 밝고도 환한 세상 사랑의 지옥이 열락(悅樂)의 천국으로 화하는 세상 고통은 고통만으로 즐거운 놀이가 되는 세상 아무 것 하나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천연 그대로의 세상 아 나는 그 속에서 지독히도 외로웠다 뼛속을 쑤시는 아픔이 빗물처럼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나의 아픔은 그저 하나의 아픔으로 불신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양수리 가는 길 위에서 나는 보았다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사월이 시든 꽃처럼 나부끼는 광경을

 

  이 시를 썼던 때는 내 자신이 꽤나 날카로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사월은 패티 김의 노래나 이와이 순지가 감독한 일본 영화 ‘사월 이야기’에서처럼 더없이 맑고 싱그러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측면에선 잔인하고 슬프고 처참한 때이기도 하다. 굳이 엘리어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리고 이제 사월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그의 시구는 진부한 클리쉐가 돼 버렸지만, 벚꽃과 목련꽃이 처참하게 스러지는 것 또한 사월이다. 사월은 순수의 계절이자 혁명의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한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일찍이 시조시인 이영도는 ‘진달래’의 이름으로 이 맑고 청명한 계절에 산화해간 어린 넋들의 혼을 위로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사월을 이렇게 노래했다.

 

저 강물은 흐르는 데

우리 어찌 죽었다 말하리

밀려오는 사월의 그날을

진달래 향기는 이리도 붉은데

굽이치는 물결 위로 그날의

그 함성 되살아 솟구쳐

일어서는 사월 오늘은

진달래 그 향기 파도쳐 오리라         

 

  봄날. 이렇게 어둡고도 깊으며 밝고도 환한 봄날, 나는 세상과 완전히 절연된 지하의 세계에서 밑도 끝도 없는 잠 속에 빠졌다가 겨우 눈을 떠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하루의 삶으로 일생을 다 살아버린 지친 애벌레의 모습을 하고 천천히 지상으로 기어오른다. 지상의 봄 햇살은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달짝지근하지만 내겐 한 순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환(幻)과 선(禪)의 빛처럼 다가온다. 아찔하게 두 눈을 찔러오는 푸른 녹색광선. 세상은 모두 환하다. 너무나 환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내 눈에 거울처럼 비치는 그 세상은 현실에 뿌리를 둔 세상 같지가 않고 꿈의 왕국과도 같다. 꿈의 왕국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온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해진다. 그저 땅바닥에 드러누워 어린애 마냥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싶어진다.

  환시(幻視)와 환영(幻影)과 환청(幻聽)과 환각(幻覺)으로 버무려진 세상. 그 속에 나는 없는 듯싶다. 없는 듯싶던 내 존재는 어느 순간 되살아난다. 겁(怯)의 시인 최승호의 말처럼 “태어나기 이전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몸 받은 이후의 나 역시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더욱 모르겠고, 죽은 다음에 내가 어찌 될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저 혼미할 뿐이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진다. 내 앞을 가로막는 짙은 안개 속에서 시정거리를 어림짐작으로 잴 때처럼 두서없고 낯설다. 나는 마치 딴 세상에 온 듯싶다. 숲이 깊고 아름다운 학교. 학교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는 싱싱하고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머플러 아래 드러난 한 여자의 목덜미는 눈물이 날만큼 희고 깨끗하고 선연하다.  

 

  몸이 아프다. 도서관 옆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아 바라보는 시계탑은 너무 높고 아득하다. 본관의 분수는 물을 뿜어낸다. 물줄기가 솟구치며 흩어진다. 몸이 아프다. 세상 끝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나무를 가만히 안아본다. 나무속에는 내 여자가 웅크리고 있다. 그를 쓰다듬는다. 열병을 앓을 때처럼 온몸이 떨려온다. 진저리치는 생의 감각, 도무지 이겨내기 힘든 이 두렵도록 환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 두고두고 몸이 아프다. 믿기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 취생몽사하는 이 격정의 봄날 오후. 그때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왔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먼데, 아주 가깝고도 먼데서 술에 취한 듯 잠에 취한 듯 슬픈 노래가 들려왔다. 슬픈 노래인데 슬픔을 사라지게 하는 노래, 그래서 한 번 듣고 나면 버려야 하는 노래, 그 노래가 들려왔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꺼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예요

  - <선운사> 전문 



  2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은 희랍 시대의 저 유명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였던가. 오늘 그대에게 좋은 일이 내일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인생만사 새옹지마라지 않던가. 기쁜 일과 슬픈 일은 늘 같이 오기에 인간의 운명의 속성은 어쩌면 일희일비하는 건지도 모른다. 습관은 인간의 신이고 그 습관의 집합체가 성격이라면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일 게다. 바닷물은 영양소를 제공받는 고기의 관점에서는 매우 깨끗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선 마실 수가 없기에 더러운 것이다. 그것처럼,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 판타 레이. 그러니 사물을 볼 때 절대적인 관점을 만들지 말고 유연하라. 집착하지 말고 과거에 연연하지도 말라. 그것은 모든 일에 무책임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숙해지라는 말이리라. “모든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닮아간다. 인간의 영혼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음악은 인간의 영혼 그 자체이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송창식의 노래가 일찍이 그러했다. 아니, 그의 노래가 곧 그였다.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 노래 속에서 먼저 가수 송창식을 떠올리기 전에 한 사람의 자연인인 인간 송창식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 정겨운 목소리로 “창식아! 어디 있니?” 하고 부르면 털털하고 소박한 함박웃음을 머금고 어디선가 곧 나타날 것만 같은 사람. 노래가 사람이고 사람이 노래인 가수, 가수이기 전의 가수 혹은 가수가 된 후의 가수. 하회탈을 닮은 그의 세상을 초탈한 듯한 웃음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촌스럽지만 천진난만한 그 웃음은 촌스럽기에 더욱 빛나고 귀한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5, 6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10대 가수를 뽑던 연말의 가요제 자리에서 그 식장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복을 입고 나와 ‘가나다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너울너울 춤을 추던 가수가 있었다.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 웃음 한 번 웃자”던 그의 손짓이나 발짓에서 그를 지켜보던 어린 시절의 꼬마는 신명과 흥겨움을 느꼈던 게 아니라 어떤 슬픔을 맛보았다.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들던 그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어느새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이 나이가 되어서도 실은 정확하게 잘 가늠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러한 종류의 슬픔을 내 주위의 가족들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인처럼 떠도는 삶을 살던 애증의 대상들. 돌이켜보면 그들이 그렇게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로 황폐하게 살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로지 착하고 순박했기 때문이리라. 돈과 학벌과 인맥이 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인 이 기이하고 이상한 사회에서 그들은 약삭빠르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지도 못했고 어느 한편에 서서 박수를 치지도 못했다. 나는 무능한 그들을 지독히도 미워했지만 이제는 형편없이 일그러진 그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하고 허전해 보이던 나의 사랑하는 연인들.

 

  <사월이 가면>이라는 그의 노래처럼 사월이 오면 나는 늘 습관처럼 시인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를 떠올리며 송창식의 <선운사>를 입 속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꽃을 보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잡아타고 선운사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언젠가 제대로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헤어진 첫사랑의 그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이를 만나 못다 한 나의 옛날이야기를 하염없이 쏟아놓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을 하고 싶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동백꽃 숲에서 몸을 섞고 싶었다. 내가 입은 옷처럼 그이를 따스하게 품어주고 싶었다. 사람의 몸이 꽃 속에 파묻히듯 오래오래 고요한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와 최영미의 <선운사에서>를 닮은 노래, 속절없는 생의 슬픔을 간직한 노래를 부르며 나는 울었다. 이 세상에 부모는 무엇이고 자식은 무엇인지, 남자는 무엇이고 여자는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이고 미움은 무엇인지, 나를 괴롭히는 이 소용돌이치는 산란스러운 마음은 또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펑 펑 펑 소리 내어 울었다. 송창식의 노래는 나를 눈물 많은 사내로 만들어버렸다.         



  3


  <상리과원(上里果園)>에 들어서면 사과꽃 향기 난다. 사월이 점점 짙어지는 어느 아슴아슴한 봄날, 나는 내 사랑하는 여인과 그의 꽃밭에 갔다. 세상 목숨 가진 것들이 제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몸뚱이를 흔들며 팡 팡 팡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던 그 비밀의 화원에서 배나무와 꿀벌과 때까치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즐겁게 춤을 추었다. 내 몸을 화하게 하던 서천 꽃밭 어귀 어디쯤 나는 사랑하는 그이의 팔을 베고 누워 <꽃밭의 독백>과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와 <하느님의 생각>을 읽었다. 아니, 내 가슴속으로 그 시들이 시나브로 흘러들었다. 그 언젠가 천년의 향기를 간직한 침향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소설가 윤대녕과 구효서와 이순원이 결국은 그 신비한 향을 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되돌아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긴 시인 중의 시인.        

 

  2000년 12월 24일, 첫눈이 소리 없이 흩날리던 성탄 전야. 60여 년 동안 천여 편의 주옥같은 절창을 남긴 미당 서정주 시인이 사당동 예술인 마을에 있는 그의 자택 봉추산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사후 1주기를 추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문예지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시선(詩仙)의 경지에 오른 그였지만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경력과 1980년대 초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인해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 천부적인 시인은 한마디로 온갖 추문과 오욕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시사의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자 치유하기 힘든 상처이다.

 

 그러하기에 타계 직후 고 은 시인을 시작으로 곧바로 불붙은 미당을 둘러싼 논쟁은 어쩌면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인지도 모른다. 논쟁에 앞서 그를 사랑하거나 혹은 미워하는 사람들 모두 고흐의 그림 <낡은 구두>를 언급하면서 문익환 목사와 김수영 시인을 예로 들어 미당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또 다른 후배시인 나희덕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듯싶다. “미당에 대한 평가는 결국 역사적 존재로서의 시인과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때 미당의 역사적 과오와 문학적 성취를 균형 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나 역시 이 여성시인의 제안이 제법 신선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미당의 행적과 시 사이의 상관관계를 균형 있게 조율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료를 남기려고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인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세에 맡겨지는 것이기에.

 

 꿈틀거리는 인간 본연의 관능적 세계를 끔찍할 만큼 밀도 있게 묘사한 첫 시집 [화사집]은 1941년 미완의 장시 <황무지>로 일가를 이룬 오장환 시인이 발행인으로 있던 남만서고에서 발간되었다. ‘자화상’과 ‘화사’, ‘노래’, ‘지귀도시’, ‘문’의 5부로 나누어져 있고 김상원의 발문이 붙어있는 이 시집엔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자화상>과 “바눌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의 <화사(花蛇)>,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로 끝을 맺는 <봄>과 “밤에 홀로 눈뜨는 건 무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괴로운 일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건 위태한 일이다.”는 섬뜩할 만큼 예리한 잠언이 서두에 놓인 <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제주도의 신화를 펼쳐놓은 <지귀도(志歸島)> 연작이 돋보인다.

 

 김동리의 발문이 게재된 고향 회귀의 관조적 세계를 밑바탕에 깔아 죄의식에 충만한 원초적 충동이 말갛게 정제된 두 번째 시집 [귀촉도]는 그의 대표작 <밀어(密語)>와 <귀촉도(歸蜀道)>, <푸르른 날>, <행진곡>, 그리고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는 유명한 구절을 낳은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들로 꾸며져 있다. 그런가하면 1946년 [귀촉도] 발간 이후 10년의 간격을 두고 1955년 세상에 나온 [서정주 시선]엔 새로 들어간 시는 적지만 정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등(無等)을 보며>, <학>, <국화 옆에서>, <신록>, <추천사(鞦韆詞)>, <춘향유문(春香 遺文)>, <광화문> 그리고 내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낳게 한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과 같은 절창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다.

 

 미당은 1960년 상재한 네 번째 시집 [신라초(新羅抄)]부터 바야흐로 점입가경의 영생적 이상향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은 1968년에 빛을 본 [동천(冬天)]의 불교적 연기의 세계로까지 확대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서정주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집은 제자에 해당하는 후배시인 박재삼의 발문을 축으로 1975년에 나온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神話)]이다. 그 시집에 다소곳이 품을 잡고 들어앉은 시들 이를테면 <신부>나 <해일(海溢)>,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침향(沈香)>, <얌순이네 집 밥상머리>, <소망>들을 보라. 이것들은 바야흐로 그의 작품의 고갱이요 정수이자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질마재는 수려한 문장가 김 훈이 ‘오줌통 속의 형이상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묘사했듯이 미당 시비가 세워져 있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옆 동네에 있는 산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지금도 시집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오줌 줄기가 뜨거운 이생원네 마누라와 마른명태를 잘도 뜯어먹는 눈들 영감, 애 못 낳는 한물댁, 단골 무당네 머슴 아이 그리고 소하고 씹한 놈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기억하는 시간은 종교학 외에 신화와 상징이론, 예술과 역사철학 등 다방면의 분야에 걸쳐 풍부한 저작을 남긴 루마니아의 종교학자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의 경험과 더불어 끊임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직선적인 시간인 ‘역사적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탈출하여 의미 있는 시간에 자신을 비추어봄으로써 존재론적 갱신을 추구하게 되는 ‘신화적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질마재는 현실적인 장소가 아니라 태초의 비밀스러운 기운이 생동하는 저 아득한 시원의 공간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질마재 신화] 이후의 미당의 시편들 이를테면 [서(西)으로 가는 달처럼 . . .]이나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늙은 떠돌이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등은 어쩌면 시작(詩作)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생에 덧붙여진 일종의 덤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기서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물들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꾸려 가는 한국인의 공동체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그 속에는 천상과 지상, 인간과 자연, 미와 추가 평화롭게 공존하며 숨쉬고 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은 ‘피의 순환과정’이라는 글에서 미당 시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난초는 하늘이 궁금하여 핀다는 미당의 시에는 뱀이 학이 되고 손톱이 눈썹이 되고 피가 맑은 물이 되는 신비한 세계가 있다. 이러한 미당의 시 세계는 현세와 내세, 개인과 전체, 아름다움과 추한 것을 하나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슬기를 우리에게 준다.” 서정주는 영욕이 엇갈린 시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훌훌 저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그의 호 ‘미당(未堂)'에 담긴 깊은 속뜻처럼 이 지상에서 제 집을 아직까지 다 짓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4


  미당 시전집에 실려 있는 화보를 들추다 보면 1975년 무렵인가 그의 회갑기념시화전을 함께 둘러보고 있는 화백이 한사람 등장한다. 그가 바로 <바보 산수>로 유명한 운보 김기창이다. 그는 평생 같은 길을 걸어가던 동업자이자 아내였던 우향 박래현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후천성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불굴의 예술혼으로 더 많은 귀감이 되어왔던 한국 화단의 거장이다. 그러나 그 역시 미당과 마찬가지로 일제 치하에서의 부역사건 때문에 친일 행적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오점을 남겼으며 한국 전쟁 후엔 좌익화가로서의 굴곡 진 삶을 살게 된다. 그의 그림세계 역시 그의 삶만큼이나 격심한 실험을 거치게 되는데 입체파적 풍속화에서 전통 산수 그리고 추상화에 이르는 그 변화의 폭과 너비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러던 그도 미당이 세상을 떠난 지 꼭 일 년 만인 2001년 12월 23일 한 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 세대는 가고 다시 새로운 한 세대가 역사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인간의 삶이란 것인가.

 

  덕수궁에서 열린 사후 1주기를 추모하는 [바보천재 운보 그림전]에서는 크게 4개의 주제를 정해 그의 작품 세계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1부는 새로운 형식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입체파적 풍속화의 시기로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이 <복덕방>, <구멍가게>, <노점>, <군밤 장수>, <보리타작>처럼 서민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인간적인 그림들이다. 2부는 한국전쟁 당시 군산 피난 시절에 손을 대기 시작한 <예수의 생애> 연작으로 이 작품은 그야말로 한국적 예수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예수와 그를 둘러싼 조선시대의 군상들은 한마디로 성서의 동양적 재해석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었다. 제 3전시실에 분류된 그림들이 운보 예술의 남상(濫觴)으로 손꼽히는 <바보산수>와 <바보화조> 연작들이다.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다가 다시 붓을 잡고 작업에 들어가 완성한 이 그림들 속에 모습을 드러낸 해와 달, 산과 강 그리고 꽃과 새들은 모두 어느 한구석이 불완전한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8세 때 걸린 장티푸스의 후유증으로 일찍이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이 비운의 화가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는 그가 잃어버린 소리를 어리숙한 바보를 닮은 자연에 되돌려주었던 것이리라. 1960년대부터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시도된 운보의 추상회화 그러니까 <점과 선> 시리즈와 <문자도> 연작들이 제 4부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반 추상에서 완전 추상에 이르는 대작 속에도 실은 자연이 숨어 있었다. 결국 점은 단순히 점이 아니라 자연의 흙이고 사람의 몸이다. 점과 선 속에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숨쉬고 있다는 뜻일까.      

 

  나는 우연히 대학 시절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미술대학에 기념강연을 나왔던 운보를 멀리서 훔쳐본 적이 있었다. 그를 보기 위해서 모여든 청중들을 향해 시종일관 바보 같은 웃음으로 응대했던 그는 수화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나갔다. 자신의 <바보 산수>를 설명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보처럼 덜 된 것이고 그 역시 한평생 바보처럼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강연을 마치고 난 뒤 손으로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고 수화를 한 후 해맑게 웃던 그의 모습이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이념과 사상에 따라 너무도 능수능란하고 영악하게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합리화시켜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운보 같은 이들은 그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바보스러움 때문에 외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김기창은 191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순종황제>의 초상으로 잘 알려진 관변화가 이당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인 1946년 같은 길을 걷던 우향 박래현과 만나 결혼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혔으며 베트남전에 종군화가로 출정하기도 한다. 첫사랑이 소재였던 초기 작품 <정청(靜聽)>엔 소리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고 <고담(古談)> 같은 그림엔 옛날이야기를 통해 교감하는 세대간의 정겨운 모습이 담겨있다.

  초기의 왜색 시비를 떨치고 세밀한 필치와 현실적 구성으로 <태양을 먹은 새>와 같은 한국적 예감과 색채로 충만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만년에 그가 귀의한 곳은 자연이었다. 푸른 기가 감도는 녹색 <청록 산수>의 세계는 선과 여백을 중시하고 미추의 경계가 따로 없는 텅 빈 동양의 산수이자 자연이다. 그의 작품들을 한참동안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해, 산, 돌, 물, 구름, 솔, 불로초, 거북, 학, 사슴 같은 십장생들이 한데 어울려 뛰어 놀고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 존재와 무의 화폭 속 세계로 그만 들어가고 싶어진다. 민화의 해학과 전통을 계승하여 자유로운 화풍을 견지해나갔던 귀머거리 화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한 사진작가의 작품 세계가 설핏 스쳐 가는 듯 하다.           

 

      

  5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보니

  사랑은 간 곳 없고 외로이 남아있는 저 웨딩케익

  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가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

  아픈 내 마음도 모르는 채 멀리서 들려오는 무정한 새벽종소리

  행여나 아쉬움에 그리움에 그대 모습 보일까 창밖을 내다봐도

  이미 사라져버린 그 모습 어디서나 찾을 수 없어

  남겨진 웨딩케익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네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가네 그대 아닌 사람에게로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로

  마지막 단 한번만 그대 모습 보게 하여주오 나의 사랑아   

  - <웨딩케익> 전문   


  솔로로 데뷔하기 전의 가수 송창식의 진면목이 펄펄 살아 숨쉬는 것은 아무래도 윤형주와 함께 했던 트윈폴리오 시절일 것이다. <축제의 노래>와 <웨딩케익> 그리고 <하얀 손수건>과 같은 추억의 노래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그들의 리사이틀 앨범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가 않고 선명한 여운을 남긴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된 그의 노래인생은 김민기가 작사한 <내나라 내겨레>나 비운의 천재감독 하길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고래사냥>과 같이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젊은이들의 울분을 담아낸 저항가요와 <상아의 노래>와 <비와 나>에서처럼 일상의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한 서정가요로 이어진다. 그러는 한편 그는 동시대의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음악인들의 곡을 자신의 앨범에 한, 두 곡씩 수록해서 발표하는데 이를테면 김정호의 <하얀나비>나 조동진의 <행복한 사람>,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임희숙의 <진정 난 몰랐네>, 박 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과 같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가요계의 명곡들이다. 노래의 맛과 멋을 아는 당대의 한량들이나 풍류객들이 왜 그렇게 송창식의 노래에 열광하는가, 그 비법은 가사 쓰기와 곡을 짓는 법에 숨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 곡을 번안해서 불렀던 트윈폴리오 시절과는 달리 <창밖에는 비 오고요>와 <밤눈>이 실려 있는 데뷔앨범과 <나그네>와 <애인>이 수록된 2집 앨범에서부터 송창식의 작곡 실력은 빛을 보게 된다. 그런데 노랫말의 작사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그를 만나기 위해 같은 학교로 온 고등학교 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이었던 아내 한성숙에게 빚을 지고 있다. 중기를 지나 후기로 갈수록 한성숙-송창식 콤비의 놀라운 작사-작곡 호흡은 그의 노래에 더 한층 탄력을 붙게 한다. 그리고 이들 부부의 마지막 결정체는 마치 이연실의 <찔레꽃>이나 <새색시 시집가네>에서와 같은 짙은 향토성과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보존된 <나의 기타이야기>였다. 이 서정적인 흥겨움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놀라운 곡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신선한 감흥을 선사하는 것이다.  


  옛날 옛날 내가 살던 작은 동네엔 늘 푸른 동산이 하나 있었지

  거기엔 오동나무 한 그루하고 같이 놀던 소녀 하나 있었지

  넓다란 오동잎이 떨어지면 손바닥 재어보며 함께 웃다가

  내 이름 그 애 이름 서로서로 온통 나무에 이름 새겨 넣었지

  하늘이 유난히도 맑던 어느 날 늘처럼 그녀의 얼굴 바라보다가

  그녀 이름 새겨 넣은 오동나무에 그녀 모습 담아보고 싶어졌지

  말할 때는 동그란 그녀 입하고 가늘고 길다란 목도 만들고

  잘숙한 허리를 똑같이 만들었을 땐 정말정말 너무 너무 기뻤지

  사랑스런 그 모습은 만들었는데 다정한 그 목소리는 어이 담을까

  바람 한 줌 잡아다 불어넣을까 냇물 소리를 떠다넣을까

  내 가슴 온통 채워버린 목소리 때문에 몇 무릎 몇 손이나 모아졌던가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몇 밤이나 울다가 잠들었던가

  어느 날 그녀 목소리에 깨어보니 내가 만든 오동나무 소녀 가슴엔

  반짝이는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지 하나 둘 여섯 줄기나 흐르고 있었지

  오동나무 소녀에 마음 뺏기어 가엾은 나의 소녀는 잊혀진 동안

  그녀는 늘 푸른 동산을 떠나 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던 거야 

  딩동댕 울리는 나의 기타는 나의 지난날의 사랑이야기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딩동댕, 딩동댕 울린다 

  - <나의 기타이야기> 전문  


  그는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것과 자연에 대한 예찬을 실행하는데 그 대표적인 곡이 <우리는>과 <사랑이야>, <나의 기타 이야기>, <참새의 하루>, <담배가게 아가씨>, <토함산>과 같은 노래들이다. <나의 기타 이야기>에서 감지되는 작품의 놀랄만한 완성도와 한성숙이 쓴 시적인 가사의 완결성, 그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멜로디의 우아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민요의 가락을 차용하거나(사랑하는 그대여 날 좀 봐요 봐요 봐요 날 좀 봐 주세요 동지섣달 꽃 보듯이 날 좀 봐요 봐요 봐요 날 좀 봐주세요 정든 님을 만났는데 빗죽뱃죽 빗죽뱃죽 말 한마디 못해 바보처럼 미소 지며 힛죽햇죽 힛죽햇죽 시간만 자꾸 가네 아리알 아리랑 쓰리랑 쓰리랑 아리랑 쓰리랑랑랑 아리쓰리 아라리요) 사설시조의 한 토막을 따로 떼어 곡을 만들거나(창 내고자 창 내고자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들 장지 열 장지 고모장지 세 살 장지 암톨쩌귀 수톨쩌귀 쌍배목 외걸새를 크나큰 장도리로 뚝딱뚝딱 박아 이 내 작은 가슴에 창 내고자 . . . 님 그려 하 답답할 때는 여닫이나 볼까 하노라) 판소리의 한 대목을 빌려오기도 하면서(사랑, 사랑, 가슴에 품어 사랑 오, 오, 오, 사랑, 사랑, 눈길에 실어 사랑 오, 오, 오, 사랑, 사랑, 손끝에 담아 사랑 오, 오, 오 . . . 어화둥둥둥 좋을씨고 내 사랑 내 사랑이로구나 사랑, 사랑, 불씨에 질러 사랑 오, 오, 오, 사랑, 사랑, 하늘에 띄워 사랑 오, 오, 오) 그의 노래는 점점 더 깊은 경지로 무르익게 된다. 한국적인 음악색깔이 묻어나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한 때를 노래에 녹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의 송창식은 <왜 불러>나 <한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 <딩동댕 지난여름>, <꽃보다 귀한 여인>, <맨 처음 고백>을 부르던 초창기 시절과는 분명 다른 지점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끌고 나가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단전호흡과 도 사상에 심취해 절에 들어가 독신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가 사람들 가슴속을 마구 휘저어 놓는 감성적인 노래와 생활 자체에서 우러나는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90년 김민기가 주관한 [겨레의 노래 1] 음반을 통해서였다.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세상 어딘가에>를 후배가수 조경옥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부른 것이다. 1970년대 성장 제일주의 정책과 무분별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 노래는 문명의 폐해를 담담하게 그려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 . . 있을까 . . . 평등과 평화 넘치는 자유의 바닷가 . . . !” 같은 노래 가사처럼 자연을 찾아 자연 속으로 깊이 침잠했던 송창식은 이렇게 우리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6


  강운구의 사진집 [모든 앙금]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 손은 떨리고 두 눈은 서늘하게 빛난다. 일찍이 화집도 아닌 사진집을 보면서 이렇게 호흡이 가빠졌던 경험은 1977년에서 1984년 사이에 찍은 김영수의 초기 사진들을 모아놓은 [떠도는 시간의 기억]과 주변부인들의 초상을 렌즈에 담은 한정식의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접했던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모든 앙금]에 실려 있는 그의 사진 한 장 한 장은 내 가슴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의 사진은 흑과 백 단지 두 가지 색이 지닐 수 있는 단순함의 깊이가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가 있구나 하는 찬탄과 놀라움을 자아내게 한다.

  렌즈에 피사체를 담아내기 위한 어떤 인위적인 장치나 무대 세트 혹은 조명 없이도 사물에 나타나는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사물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있는 기미까지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는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어떤 현상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혁명가이기도 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울로 파졸리니의 말처럼 ‘신성함은 단순함이다.’ 사물의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순간은 어쩌면 인간의 생에 있어서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 사물에 스며있는 그 사물만의 고유한 생기는 인간의 내부에 숨쉬고 있는 감정의 섬세한 촉수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인간의 신체의 어떤 부분 이를테면 얼굴이나 손, 발, 어깨 등에 발현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물이, 사물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 사물의 배후에 깔린 아우라, 진정성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미셸 푸코는 일찍이 이렇게 환원 불가능한 사물의 정황을 ‘이것은 파이프’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가시화할 수 있는 사물의 겉모습, 다시 말해서 사물의 외관이 실은 얼마나 허위에 가까운 날조된 이미지인지 똑똑하게 드러내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허깨비의 장난과 같은 정신의 착란일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관한 노트인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이 재현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는 뜻이리라. 사진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시선의 역사’를 강조했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선이다.”는 카프카에게 한 야누흐의 말을 즐겨 인용할 정도로 바르트는 내면을 향해 자신의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시선에 집착했다. 본질 속에서 ‘있는 그대로’ 되찾고 싶은 분위기, 삶의 가치가 신비스럽게 얼굴에 반사되도록 이끌어가는 어떤 정신적인 것. 그것은 진실 - 나를 위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시선이었다. ‘사진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나 ‘죽음이 사진의 본질이다’는 암울한 아포리즘은 역설적으로 그가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외관 이외의 것을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현상학적인 인간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경꾼으로서 ‘감정’에 의해서만 사진에 흥미를 느낄 뿐 사진에 정식으로 질문하는 자가 아님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까. 그는 눈으로 보고 느끼고 구별하고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의 상처로서 깊이 파고든다. 사진에서는 무엇인가가 작은 구멍 앞에 놓여지고 영원히 그곳에 머무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원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채워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비워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진의 ‘노에마(Noema)’를 그는 스투디움(Studium)과 풍크툼(Punctum)으로 구별 지어 부르려고 한다.

  정보적 층위에서 상징적 층위로 나아가는 자연스러움,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정보와 관심만을 보여주는 스투디움의 영역은 제 3의 의미를 부여하여 비가시적 영역의 창조로 연결되는 풍크툼에 비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화살처럼 찔러오는 대상의 어떤 강렬함을 지시하는 풍크툼에 비해 스투디움엔 신선하고 참신한 상상력이 끼어 들 여지가 없다. 새로움이 거세된 죽음의 사각지대. [카메라 루시다], 아니 바르트의 [환한 방]은 사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해 들어가는 그 자신의 현상학이다. 현상학이란 곧 본질학이 아닌가. 강운구에게 있어서 그 본질은 ‘자연’이다. 그 자연은 문명 속에 기거하는 자연이고 문명에 의해 추방당한 자연이며 그래서 이제는 문명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낯선 자로서의 자연이다.         

 

  벌써 일년이 지났다. 작년 이맘때쯤 함초롬이 비에 젖은 소국 같은 여자 후배와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강운구 초대전 - 마을 삼부작’을 둘러본 것은. ‘마을 삼부작’은 강원도 원성군(원주군) 소초면의 황골과 강원도 인제군 북면의 용대리 그리고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 위치한 수분리의 사라져 가는 옛날 풍경을 담은 사진들로 구성돼있었다. 마을들은 연극평론가 안치운이 그의 산문집 [옛길]에서 묘사한 화전민의 촌락처럼 대부분 문명의 손길이 가 닿지 않은 오지에 가깝다. 그 속에는 낫을 들고 바위에 앉아있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과 눈 내리는 겨울, 아이를 업고 있는 아낙과 너와집 마루에 나란히 앉아있는 노부부와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주민들과 곤히 잠든 동생을 들쳐 업은 누나와 농부의 투박한 손과 외양간에서 나온 소와 재래식 부엌의 모습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전시장을 다 둘러보고 난 뒤의 내 느낌은 한마디로 평온함 그 자체였다. 그는 여태껏 세 번의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1994년에 있었던 ‘우연 또는 필연’ 전에서는 1970년대의 모습을, 4년 뒤에 가졌던 ‘모든 앙금’ 전에서는 1994년부터 1998년 사이의 농촌 풍경을, 그리고 작년엔 다시 1970년대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이름이 붙은 전시회에서 미술관 벽에 걸렸던 몇 몇 사진들은 최근의 ‘마을 삼부작’ 사진집에 그대로 다시 실리기도 했다. 그가 전에 발간한 사진집으로는 [내설악 너와집](1978)과 [경주 남산](1987)이 있고 최근엔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1999)와 ‘숲속의 방’의 작가 강석경과 함께 꾸민 [능으로 가는 길](2000)이 시중에 선을 보였다.

 내가 처음 그의 사진을 접했던 것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준 높은 인문 교양지 [샘이 깊은 물]에서였다. [현대문학]과 같은 전통 깊은 문예지에서도 그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진은 가볍지 않고 깊다. 그 깊이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쏭의 작품집 [결정적인 순간]에서 받은 충격과 사진의 본질이 기록성에 있다고 믿는 그의 신념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집 제목처럼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시회장 안의 커피숍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사진기자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를 훔쳐볼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을 사랑하는 애호가로서 “강 선생님. 좋은 사진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라는 인사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주변머리도 없는 나는 내내 옆에서 들리는 그의 말에 한동안 귀만 기울이다가 동행했던 후배와 도망치듯이 서둘러 미술관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의 사진 속에 등장했던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직도 거기 그곳에서 비와 눈과 바람을 맞으며 그대로 살고 있을까? 여전히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그의 말처럼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없다.’    

 


  7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의 마지막 구절로 유명한 월북 시인 백 석은 김소월과 같은 평안도 정주 출신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이 경상도, 서정주와 김영랑이 전라도, 정지용과 박용래가 충청도, 한용운과 오장환이 강원도, 김동환과 이용악이 함경도 지역의 말을 통해 그 지방의 향토색을 여지없이 드러낸다면 백 석은 한국 시단에서 평안도 방언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토속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무래기(모시조개), 노라리(건달), 말랭이(마루), 차랍(찰밥), 청밀(꿀) 같은 낱말들은 백 석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그 지방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평안도 고유의 사투리이다.

  1930년대 한국 시단에서 임 화나 설정식, 권 환으로 대표되는 리얼리즘이나 이 상과 김기림 같은 모더니즘 시인들이 판을 잡고 있을 때 유독 그만은 도시 생활과 거리가 먼 고향의 풍물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는 눈 내리는 겨울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화나 전설, 민담의 세계다. 그 아득하고도 신비한 설화의 세계는 근대화의 뒷전으로 밀려난 잃어버린 고향의 정든 풍경이자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숨쉬는 원형의 공간이다.

 

  그는 나라 잃은 시대에 한평생을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녔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와 같은 이국적인 정서가 풍기는 시도 있지만 명절날 대가족의 단란하고 오붓한 한 때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여우난골족>이나 공동체 생활의 행복한 일상이 묻어나는 <고야(古夜)>, <가즈랑집>, <모닥불>, <국수> 그리고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입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금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밟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는 구절이 돋보이는 <고방> 같은 작품엔 병든 문명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훼손되지 않은 생기발랄한 토착적 민중의 세계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시골의 장터나 주막, 여인숙이 등장하는 그의 시는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그 속에 생생한 체험들이 녹아있다. 영어를 공부했고 또 가르쳤던 그가 어떻게 이토록 풍요롭고 전통적인 소리와 맛과 냄새가 진동하는 건강한 민속의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었을까. 김수영의 <거미>와 곧잘 비교되는 시 <수라(修羅)>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승(女僧)> 외에 적막강산이나 다름없는 북방의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갈곳 없는 뜨내기의 회한이 가슴을 치는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과 같은 시는 그 쓸쓸한 고적함 때문에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 없을 지경이다.

 <삼방>, <탕약(湯藥)>, <귀농(歸農)>, <목구(木具)>, <흰 밤>, <외가집>, <칠월(七月) 백중>처럼 작품 제목부터가 이미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회귀와 순환의 세계에 사로잡힌 이 지나치게 섬세하고 예민하던 천재 시인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허 준을 모델로 한 시와 친구였던 화가 정현웅에게 주는 시를 남기기도 하고 두 보나 이 백의 집을 자신의 시속에 짓기도 한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하여 이듬해 첫 시집 [사슴]을 발간했던 백 석이 꿈꾸던 <고향(故鄕)>엔 같은 월북시인인 이용악의 시 “은모래빛 은모래빛 강변에서 우리의 순이는 전차에 올랐다. 얼마나 불쌍한 떠돌이인가? 강변을 떠나 도둑놈의 소굴인 도시로 온 것이. 간밤에 친척집에 갔다가 오늘 아침 멀건 수제비 국 한 그릇 얻어먹고 쫓기듯 거리로 나왔다. 백마 탄 왕자는 사치. 허기진 한끼를 때울 일거리가 필요했다. 남의 집 부엌데기라도 좋아. 순이는 보따리를 가슴 앞에 꼭 움켜쥐었다. 누군가 순이의 가슴을 찔렀다. 억울했지만 꾹 참았다. 누군가 고무신 발등을 밟았어도 꾹 참았다. 촌년이라고 욕해도 꾹 참았다. 순이는 전차에서 내렸다. 보따리 속에 꼭꼭 간직했던 돈이 없다. 세상은 순이를 혼자 남겨놓았다.”에서 보이는 타향살이의 막막함이 완곡하게 드러나 있다.     

 

  나는 북관(북쪽 지방)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보러 갔다 

  의원은 여래(보살) 같은 상을 하고 

  관공(나라 일을 맡은 공무원)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어 내린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고향> 전문

 


  8                                      

 

  선 듯 선 듯 잊읍시다 간밤 꾸었던 슬픈 꿈일랑 아침 햇살에 어둠 가시듯 잊어버립시다

  없던 일로 해둡시다 함께 피웠던 모닥불도 함께 쌓았던 모래성도 없던 일로 해둡시다

  가끔가끔 찾읍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읍시다

  - <잊읍시다> 전문


  “청명 한식에 나무 심으러 가자. 무슨 나무 심을래. 십리 절반 오리나무 열의 갑절 스무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거짓 없어 참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네 편 내 편 양편나무 입맞추어 쪽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이 나무 저 나무 내 밭 두렁에 내 나무...... ”라고 하던 <나무 타령>이라는 동요에는 ‘내 나무’가 나온다. 박식한 칼럼니스트 이규태에 의하면, 식물도감에는 나와 있지 않은 내 나무는 예전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몫으로 심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나무는 한 사람의 일생과 늘 함께 하는 나무였을 것이다. 실제로 옛날 옛적 깊은 산촌에선 산모가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나 잣나무를,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나 늙어서 죽을 때면 자신의 나무로 가구를 만들거나 관을 짜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나무는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신세대 철학자인 이주향은 문명은 간절함을 쉽게 배반하는데 자연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문명 속에서의 간절함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라면 자연 속에서의 간절함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을 대변하듯이 우리 곁에는 '산에 가면 나는 좋더라 바다에 가면 나는 좋더라 님하고 가면 더 좋을네라만!'<산에 가면>(조운:1900-1947년 월북)이라는 어깨춤을 들썩이게 하는 신명나는 시와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 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묵화>(김종삼:1921-1984) 같은 마음 한 켠이 애련해지는 시도 있다.

  또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을 배경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는 풍만한 여체의 아름다움을 그려놓은 이숙자라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딱 들어맞는 [걷는 행복](이브 파칼레/궁리)혹은 [걷기 예찬](다비드 르 브르통/현대문학)이라는 책과 인간의 본성은 원래 느린 것이 아닐까 반문하게 되는 [느림](밀란 쿤데라/민음사)과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피에르 쌍소/동문선) 같은 책들이 한동안 서점가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엘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나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같은 책들을 볼 때 내 마음은 행복해진다.

 이 풍요로운 삶의 예찬 또는 생명 예찬의 위대하고도 오랜 전통은 서양에서는 장 자크 루소, 랄프 왈도 에머슨,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 같은 사상가나 마르틴 하이데거, 앙리 베르그송, 가스통 바슐라르 같은 철학자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 딜런 토마스, 프리드리히 횔덜린, 로버트 프로스트, 게리 스나이더들의 시인에서 그리고 동양에서는 <어부사>와 <귀거래사>의 명문장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의 굴 원과 도연명, 이 백이나 두 보, <장한가>의 백낙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가>의 대명사 일본의 바쇼를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면 통일신라의 죽림칠현과 고려의 이규보, 조선의 송강 정 철과 고산 윤선도 그리고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 그 희귀한 전통이 머무른 자리는 송창식이라는 한 음악인인 것이다.     

 

  그는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만든 가수로도 유명하다. 어찌 보면 그의 노래에 숨어있는 섬세한 감수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품인 것처럼도 보인다. 김남조의 <그대 있음에>나 박남수의 <새>와 같은 시들이 그것인데 유독 미당 서정주의 작품인 <푸르른 날>과 <선운사>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가 짙고 독특하다. 가요라기보다는 고전적인 클래식의 범주로 접어드는 듯한 인상이라고나 할까. 일찍이 미당 서정주는 송창식을 두고 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찬한 바 있다 "가수 송창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의 슬픔을 뼈에 저리게 느껴 노래할 줄을 아는 사람이다. 특히 유난히도 대단했던 이 겨레의 슬픔의 바닥의 소리가 무엇인가를 잘 아는 가수이다. 그러나 그는 또 이 슬픔을 자기 나름대로 졸업함으로써 이겨 사는 여유와 유머와 풍류를 빌어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기의 가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우리의 꽃다운 생명의 어쩔 수 없는 환희를 풍겨내고 있을 줄도 알고 있는 좋은 가수이다." 

 

 

  9

 

 복잡하고 바쁜 도시의 문명생활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연을 잊고 산다. 도시인들에게 자연은 고작해야 일을 하다가 지쳤을 때 잠시 쉬러 가는 휴양지로 인식돼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사회 각계에서 기계화된 문명적 삶을 벗어나 자연에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갈구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번져가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화두가 이와 관련된 생명사상과 생태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여 진다. 시민사회의 환경운동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 가는 사실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는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자연을 지배,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착취하는 데로만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산림은 황폐해지고 한정된 자원은 고갈되어 급기야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식민지 건설에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제국주의로 대변되는 이러한 서구 열강의 식민정책은 자연에 몸을 담근 채 건강한 공동체 생활을 해나가던 원주민들의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훼손시키고 파괴해버린다.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존경받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꾸려나가던 히말라야 산중의 한 마을 라다크가 무분별한 서구식 개발에 의해 생태적 균형과 사회적 조화가 철저하게 붕괴된 사례가 바로 그것을 입증해준다. 라다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도구적 이성을 앞세운 서양의 근대화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 마음까지 병들게 했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의 지혜를 저버린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산업주의 기술 문명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고 그에 순응하고자 하는 동양의 자연친화 사상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통한 마음의 참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경계해야할 점이 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고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일시에 그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원시적인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문명사회가 싫다고 해서 지금까지 유지해온 합리적인 생활양식까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은 있을 수가 없고 또한 합리적인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적인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회생태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은 현대인이 문명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하는 데에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자유를 상호 결합시키는 ‘유기적 사고방식’과 ‘변증법적 이성’을 복원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태학적 대안을 모색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이제 존경해야할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지배되어야할 대상도 아닌, 생명의 유기체적 진화과정에서 함께 걸어가야 할 참여와 자유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소박한 가르침에 병든 문명의 중심에 서 있는 현대인들은 단단하게 빗장을 질러놓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겸허하게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족에게는 이 대지 위의 모든 부분이 다같이 신성하다. 모든 언덕, 모든 골짜기, 모든 평원과 숲이 지금은 이미 사라져버린 날들의 슬프고 행복했던 사건들과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대가 서 있는 이 땅도 우리를 만나면 더욱 기쁜 표정을 짓고 우리 부족의 발걸음 아래서는 더욱 다정하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의 땀으로 인해 기름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맨발이야말로 이 땅과 훨씬 더 잘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계절 동안 이곳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던 어린아이들조차 이곳의 적막을 사랑한다. 황혼녘이 되면 어스름 속에 되살아나는 영혼을 기쁘게 맞이할 줄 안다. 최후의 붉은 인간이 사라지고 나면 얼굴 흰 사람들에게 우리 부족의 추억은 하나의 신화로 남을 것이다. 이 해변가는 이 땅의 보이지 않는 혼들로 붐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들판과 상점, 고속도로, 길 없는 숲의 정적 속에 홀로 있더라도 결코 혼자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밤이 찾아와 그대들의 도시와 거리가 적막에 빠져 황량하게 느껴질지라도, 그곳에는 한때 이 아름다운 땅에 가득했던 주인들이 돌아와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결코 혼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라고 해서 힘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그  들을 생각하며 우리 부족을 더욱 공정하게 친절하게 대하라. 내가 ‘죽은 자’라고 했던가? 사실 죽음이란 없다. 세상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의 말에서

 

  (132매)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4월호)

                       


홈 목록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14
2010.09.14.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나오는 말) [1]
950
13
2010.09.14.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3월) . . . 채희준, 나 홀로 가는 어떤 싱어송라이터의 …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3월호
962
12
2010.08.25.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8월) . . . 이상은, 영성(靈聲)이라는 이름의 한 매혹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8월호
945
11
2010.07.22.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7월) . . . 박인희 & 이연실, 은밀한 내 꿈과 몸을 섞는… [1]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7월호
834
10
2010.06.06.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6월) . . . 한대수, 세속과 신성의 경계를 떠도는 고독…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6월호
1033
9
2010.05.05.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5월) . . . 김광석 & 안치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1]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5월호
1114
2010.04.05.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4월) . . . 송창식, 자연의 기쁨을 노래하는 한 음악인…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4월호
1233
7
2010.02.15.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2월) . . . 조동진 & 장필순 , 순간에서 영원을 가로지… [1]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1년 2월호
1143
6
2010.01.20.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1월) . . . 정혜선, 투명하고 그리운 기억으로의 여행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1년 1월호
808
5
2009.12.24.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12월) . . . 김정호, 님이 부재하는 시대의 님을 위한 진…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12월호
1416
4
2009.11.20.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11월) . . . 김현식, '나'와 '또 다른 나' 사이를 건너가… [1]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11월호
1280
3
2009.10.19.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10월) . . . 한영애,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마법의 노래 [3]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10월호
971
2
2009.09.28.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9월) . . . 박은옥, 흔들림 없는 서정 그 서늘한 아름다…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9월호
1140
1
2009.09.28.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들어가는 말) [3]
1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