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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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5월) . . . 김광석 & 안치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한 만가
보물섬  
 

상처가 날아간 자리에도 희망의 꽃은 피어나는가

 - 김광석(안치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한 만가

 

 

 

  육체 속에 갇힌 나의 영혼이여 너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너의 등에 깃털 달린 날개 있어 너보다 밝은 그곳으로 날아오를진대

  이곳의 어두운 낮을 무엇 때문에 좋아하리오

  -  조아성 벌레

 

 형제여, 바다는 거칠다 우리의 바다는 거칠다

  - 자파르 파니히


  누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했나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흘러 강을 이루었나

  - 메르세데스 소사

 

 오늘날 대부분의 시는 읽혀지기 위해 쓰여 지지만 듣기 위한 시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종이 위에 활자로 쓰여 진 시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개인적인 교신을 갖는다면 음유시는 더 넓은 독자와의 공감 다시 말해서 그 노래를 좋아하는 다수의 청중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음유시인은 우주와 교감하고 만인의 심금을 울린다. 오르페우스가 그랬고 백수광부의 처가 그랬다. 음유시에는 항상 ‘민중’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소리는 국경도, 계급도, 남녀의 구분도, 언어의 장벽도 없는 탓에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 바로 가서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무명시인과 무명가수들이 남긴 노랫가락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까닭은.

 

 음유시인들은 그 노래를 모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나누어주는 이들이다. 왕이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가 있는 반면 그의 반대편엔 민중으로 대변되는 피지배자들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민중의 역사는 세계의 전역에서 수많은 노래로 불려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다.

 

 예지의 서양시인 빌헬름 버틀러 예이츠가 그의 시 <술 노래>의 첫 구절을 빌어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고 말한 것처럼, 동양의 시선(詩仙) 이 백이 <대지의 슬픔을 위한 술 노래>에서 ‘술은 금 술잔에 이미 넘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마시지는 말아라. 우선 먼저 내가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리니,’라고 읊었던 것처럼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운을 받아 한국의 국민시인 소월 김정식이 <님과 벗>에서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로 끝맺었듯 술을 마실 때와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보통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일시적인 유행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반면 당대의 뛰어난 시에 선율을 붙여 부르는 음유시인 - 중세 유럽에서 봉건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근대 유럽의 시의 원조이기도 하며 독일에서는 미네징거(Minnesanger), 이탈리아의 경우 트로바토레(Troubadour), 프랑스는 트루바두르(Trovatore)로 불려졌다. 장인시인, 직인가인인 마이스터징거(Meistersinger)로 통하며 한 사람이 작사, 작곡, 노래를 모두 소화했던 이들은 14-16세기 독일의 주요도시에서 장인 및 상인계급의 음악가, 시인들로 구성된 시가조합에서 출발하여 주로 기사들의 로망스와 무용담, 사랑과 죽음, 전쟁, 유행들의 소재를 서사시 형식을 빌려 풍자했다. 음유시인의 노래는 기악 반주가 따르는 3박 계통의 독창곡으로 단성의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리듬과 각 절이 분명한 후렴을 지니는 특징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르네 샤르는 이들 음유시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투명했던, 혹은 해와 달 같았던 유랑자들은 그 시절, 사람들이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었던 숲과 마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네.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바랑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짊어지는 사이, 상냥하고 섬세한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시로 담소를 나눴네. 정착한 이들은, 마음을 움직인 상상력은, 그들에게 빵과 술과 소금과 양파를 주었네. 비 내리면 짚으로 만든 우의도 건네주었네.” - 의 노래들은 그 생명력이 사뭇 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노래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대중음악과는 달리 한 자아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길로 인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샹송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 음유시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조르주 브라상스는 비용과 엘뤼아르, 아라공의 시를 노래했고 좌파 지식인인 벨기에의 가수 자크 브렐과 정치학을 전공한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와 장 페라는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가수이며 <죽도록 사랑해>의 가수 프란시스 카브렐은 녹색당 소속의 지방의원인가 하면 사르트르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던 줄리에뜨 그레꼬 역시 남미의 반독재 시위대 앞에서 콘서트를 여는 저항활동의 기수이다. 감미로운 샹송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이브 몽땅이나 사회참여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장 자끄 골드만마저도 <붉음>이라는 메시지가 강한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단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 속에 깊이 뿌리 내리려는 의식이 투철한 민중가수들이 존재해왔다. 독일의 한스 바이더나 캐나다의 부르스 콕번, 터키의 쥘푸 리바넬리, 스페인의 유이스 아크, 포르투갈의 조제 아폰주, 러시아의 불라트 오쿠자바, 알제리의 아미드 바루디, 앙골라의 봉가 쿠엔자, 남아공의 미리암 마케바와 압둘라 이브라힘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의 북부 바스크 지방 출신의 음유시인 파코 이바녜스는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스무 살에 쓴 <스무 개의 사랑의 시와 한 개의 절망의 노래>나 19세기 말 모데르니시모 운동의 선구자였던 루벤 다리오의 <봄에 부르는 가을의 노래>에 곡을 붙여 즐겨 불렀었다. 그는 또 1936년 스페인 내란 때 희생된 페데리고 가르시아 로르카의 옛 친구이기도 한 대시인 라파엘 알베르티와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세기의 파란 많은 굴곡의 역사로 인해 스페인과 중남미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음유시가 많이 불려졌었다. 많은 전쟁과 극심한 정치적 변동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독립을 위해 투쟁을 하면서 입은 많은 상처들이 노래에 생생하게 반영되어 민중의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 노래의 주제는 ‘사랑’과 ‘조국’이다. 투쟁의 역사는 상처의 역사다. 아니, 상처의 역사가 곧 투쟁의 역사이리라. 그리고 그러한 투쟁은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전위된다.

 

 볼리비아 출신의 음유시인 호르헤 테이예르는 “그 어떤 시도 불의를 뒤집을 힘은 없다. 하지만 시는 우리에게 그 어떤 고통에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했고 그러한 고백은 “나의 목소리는 여러분의 목소리가 되고 싶다. 마치 여러분의 목소리가 내 것인 것처럼.”이라 말했던 스페인의 음유시인 루이스 에두아르도 아우테의 간절한 바람과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의 경우도 노래의 대 사회적 기능은 다를 바가 없었던가 보다. 혜강의 글 <성무애락론>은 중국의 음악사상사, 나아가 예술사상사에서 고대 중국의 유가와 도가가 음악을 바라보았던 기본적인 관점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고 매우 의미 있는 사료이다.

 

 주인과 객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글의 요지에 따르면, 음악에는 슬픔이나 즐거움이 따로 없다. 소리에 밝은 자는 그 소리가 아무리 미묘해도 그 속에 담긴 뜻을 알아낼 수가 있으며 마음의 미세한 변화도 소리의 높낮이, 강약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소리와 마음이 모두 몸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길흉을 미리 알지 않았을까. 감정이 악기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이미 여러 악기와 지방 음악이 각기 고유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음악에는 자연히 정해진 애락(哀樂)의 정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음악은 사람을 울리기만 하지 웃게 한 적은 없다. 예로부터 풍속과 민심을 바꾸는 데는 음악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 것도, 또 공자가 몹쓸 음악은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모두 여기서 기인한다. 결국 음악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정치가 평화로울 때의 음악은 안온하고 즐거우며, 망해가고 있는 나라의 음악 소리는 애수에 차 있고 비탄에 빠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한 나라가 평화로운가 혼란스러운가는 정치하기에 달렸으며 음악은 그것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가 하면 음을 이어 엮어 악기로 연주하고 간척(干戚)과 우모(羽毛)를 갖고 춤추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악이라 한다고 정의한 중국의 고전 [예기]의 <악기(樂記)편>에는 음악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모든 음악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게 된다. 안에서 감정이 움직이기 때문에 소리가 되어 나타난다. 소리는 글을 이루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이 편안하고 즐거운 것은 그 나라의 정치가 잘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지러운 나라의 음악은 원망과 분노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성(聲)에서 음(音)이 비롯되고 음에서 악(樂)이 나온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자고로 소리만 알고 음을 모르는 자는 금수와 같고 음만 알고 악을 모르는 자는 서인에 가까우며 악을 아는 것이 비로소 군자라고 했다. 음악은 늘 그 시대의 모습과 사회상을 대변해왔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한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에도 음악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일깨워주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가수가 아닌 시인의 목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는 밥 딜런은 “이 세상에는 사랑타령 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단 한마디 말로 이 모든 정황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있다.

 

 또한 음악에서의 ‘조화’와 ‘분별’을 강조한 [주역]의 <계사전>을 보면 가장 위대한 음악은 쉬운 것이고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간단한 것이라는 간이(簡易)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그럴 때만이 악자낙야(惡者樂也),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음악을 즐겁게 접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이리라. “음악은 인간의 영혼 그 자체이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닮아간다. 인간의 영혼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1. 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정호승 시, 김광석 곡 <부치지 않은 편지> 전문


  [김광석 앤솔로지 - 다시 꽃씨 되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앨범이 발표되고 연이어 그를 추모하는 콘서트가 열렸다. 생전에 그와 친분이 있던 동료 가수들이 나와 그의 노래들을 한 곡 한 곡씩 불렀다. 죽은 자의 음성에 산 자의 음성을 덧입혀 새롭게 탄생한 박학기의 <잊어야 한다는 이유로>와 <외사랑>를 시작으로 <사랑한다는 이유로>의 김장훈 그리고 권진원의 <변해가네>가 이어졌다. <서른 즈음에>를 부르던 장필순은 곡의 말미에 눈시울을 붉혔고 <그날들>을 열창한 안치환은 떠나간 벗을 떠올리며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합창했다. 이소라나 한동준, 강산에, 조규찬, 윤도현 같은 동료 후배 가수들은 저마다 그에 대한 그리운 추억 한 자락을 앨범의 말미에 끼워 넣고 있다. 그만큼 그가 보고 싶다는 뜻일 터이다. 그들에게 가수 김광석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 가수를 알고 있다, 고 말하는 순간 그는 곧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저쪽은 아득하다. 너무 아득해서 손을 내밀면 점 점 더 그는 내 곁에서 멀어진다. 멀리 달아난 그리하여 내 눈앞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그가 가는 곳은 어디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할 때가 있다. 살아생전에 나는 김광석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그의 콘서트 장에 가본 일도 없다. 그렇지만 그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되어 늘 내 주변을 맴돌았다.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 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온다면 아마 그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그일 것이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미셸 푸코가 “21세기는 그의 시대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질 들뢰즈가 자신의 집 이층 베란다에서 투신자살을 감행한 그 며칠 후에 그의 부고 기사가 신문에 실렸었다. 평생 동안 위반과 탈주 그리고 머물지 않는 유목민의 생활을 꿈꾸던 한 철학자의 죽음의 진상이 베일에 싸였던 것처럼 가수였던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여전히 판명되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수수께끼는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므로 이 가수의 죽음을 알고 있지 못하다. 이 가수의 죽음을 알고 있지 못할뿐더러 이 가수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노래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시절의 노래로부터 시작해서 동물원 시절의 그의 곡과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아름답게 빛나던 곡들을 말이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노래가 남아있는 이상 사람도 남아있는 것이다.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내 마음이 외롭고 춥고 쓸쓸할 때 비 오는  오월의 거리를 지나다가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순간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지고 현실의 세계인 차안과 꿈의 세계인 피안이 몸을 섞는 것이다. 아니면 그가 떠난 후에서야 그의 노래가 가수의 육체를 빌려 덧없는 이 세상을 떠도는 것일까.   

 

  그가 남기고 간 노래들 이를테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 시절의 <그루터기>와 동물원 시절의 <거리에서> 그리고 솔로로 독립한 후 발표한 <나의 노래>와 <이등병의 편지>, <사랑했지만>, <나무> 등은 그의 대표곡이 됐지만 아무래도 그가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과 비밀이 담긴 앨범은 그의 4집 음반이었을 것이다. 4집에 수록돼 있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일어나>나 <서른 즈음에>,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아니었음을> 외에도 <회귀>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혼자 남은 밤>들을 듣고 있으면 ‘아! 이 남자는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고 만다. 그가 생존해 있었다고 해도 그 이상의 완성도 높은 작품은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수 김광석의 모든 것은 4집에 고스란히 용해돼 있다고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한마디로 그의 음악인생의 결정체이자 고갱이에 해당하는 이 앨범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형적인 한국의 음반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제작자의 책임? 그 앨범을 발매한 음반회사의 책임? 아니면 그의 가치를 몰라본 대중들의 책임?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그렇게 진정한 음악인 한 명을 어이없이 잃어버렸다. 물론 그의 죽음의 사유가 음반의 실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제작한 결과물이 일반인들에게 버림받았을 때 의식 있는 예술가라면 틀림없이 좌절의 깊은 수렁 속으로 침몰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가 입은 심적 타격은 의외로 커서 아마도 헤어나기 힘든 외로움에 몸을 떨어야했을 지도 모른다. 예술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노래도 그런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의 사후에 비로소 빛을 본 라이브 실황공연을 담은 [노래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대변해주고 남음이 있다. 그의 육성은 진솔하다 못해 평범한 비범함이 무엇인지를 일러주고 있어 어떤 외경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야말로 삶의 단계에 있어 최고의 경지일 것이므로.

 

  그는 정규 앨범 도중에 문득 [다시 부르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음악여정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작업과 잊혀진 음악인들의 명곡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그가 앞으로 가야할 길의 좌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그의 동료였던 안치환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만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가 되살려낸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의철의 <불행아>, 한 대수의 <바람과 나>,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그 자체가 그 이전에는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려 하지 않았던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 작업이다.

 

 비운의 작곡가 윤명운이 쓴 노래들이 한영애를 통해 뒤늦게 빛을 보거나 반대로 이주원과 전마리의 한 생애에 걸친 고독한 항해가 결국은 세인에게 잊혀지고 마는 결과를 낳았다면 김광석의 고군분투는 절친한 벗이었던 안치환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맞물려 이제는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기록돼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객 - 김광석이 남기고 간 노래]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그의 추모 앨범에서 <희망의 노래>의 류금신과 <불나비>의 김영남 그리고 <살다 보면>의 권진원이 부르는 <바람꽃>과 <이름 없는 들풀로 피어>, <내 사람이여> 같은 곡들이 고요한 파문을 남기는 까닭은 아마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한 명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를 좋아했었고 또 한 명은 신촌 블루스 출신의 정경화를 좋아했으며 나머지 한 명은 동물원 시절의 김광석을 좋아했었다. 김광석을 좋아했던 친구가 즐겨 불렀던 애창곡은 <그날들>이었다. <그날들>에서 감지되는 삶의 한 부분을 미리 훔쳐본 자의 예정된 운명이 <부치지 않은 편지>로 옮아간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는 슬며시 웃어버린다. 부칠 수 없는 편지도 아니고 부치지 못한 편지도 아닌 왜 하필이면 부치지 않은 편지였을까. 그것은 생명공학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전자 지도에 명시된 프로그래밍 된 인간의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진에 인화된 사람 좋은 그 웃음에서 나는 인간의 의지나 이성으로는 어찌해볼 도리 없는 불가항력적인 허무의 뿌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뿌리는 암세포처럼 그의 생애 속으로 깊고 너르게 확장되고 만 곤고(困苦)한 삶의 뿌리이다.

 

 허진호는 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때 이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 겉늙음의 징후와 조짐들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포착해냈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인간의 삶은 이미 어느 정도는 정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념이 결코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면 고즈넉한 곳을 혼자 걸으며 그의 노래를 부를 때처럼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그가 가야하고 내가 가고 또 우리 모두가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인생길, 미만(未滿)한 안개 속에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피도 눈물도 없이 막막하고 막막한 춥고 고단한 사육제의 나날들이기 때문이다. 

 

 김광석은 긍정과 부정 사이에 존재한다. 아니, 그 사이를 시계추처럼 되풀이해서 오간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반문하다가도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왔는 걸’이라고 자위하면서 일면 초탈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와 관조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안치환처럼 첨예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불편부당한 역사나 사회에 철저하게 개입해 들어가지 못하고 세속과 신성의 경계를 영원히 떠도는 비극적인 중간자처럼 문 앞에서 끊임없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안치환이 자신의 인생관을 그 특유의 뚝심으로 긍정의 삶 쪽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비해 김광석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부정의 긍정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부정의 긍정이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인식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나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 순간에 말라버리지’ 혹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오직 슬픔만이 돌아오잖아’라거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스쳐 가는 의미 없는 나날들 두 손 가득히 움켜쥘 순 없잖아’와 같은 노랫말에도 보이듯 그는 궁극적으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고 탄식하거나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 속에 내 모습은 더욱 더 쓸쓸하게 보이네’라고 우울해하는 것이다. 그 우울함이 지나쳐 극에 달하면 거리를 거닐며 노래를 불러 봐도 내 슬픔은 환하게 밝아지는 눈물로 일순 전위될 뿐 결국은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라는 극단적인 자기다짐 내지는 자기최면으로까지 확장되고 마는 것이다. 부정적인 인식의 극대치까지 솟아오른 자에게는 이제 <끊어진 길>만이 보일 뿐이다.

 

 슬픔의 음유시인 이무하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통해 고백한 “높푸른 하늘 희고운 구름 먼 산허리 휘돌아 흐르는 강물 아무 말 없어도 이젠 알 수 있지 저 부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 . . 저 부는 바람에 실려 가는 향긋한 꽃내음 내 깊은 잠 깨우니 나도 따라 가려네 그 길 끊어진 너머로 나는 가려네'와 김지하의 시를 빌려온 <회귀>의 다음과 같은 가사를 보라.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검은 등걸 속 애틋한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저 꽃들은 가네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기인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젊은 날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흙으로 가네 봄날은 가네 그 빛만 하늘로 오르고 빛을 뿜던 저 꽃들은 가네”              

 

 안치환은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으며 김광석은 일단 그 길의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 막다른 골목은 김광석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지만 그 의지마저도 실은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김광석은 선택함으로써 다시 선택 당했다.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면 그곳엔 4차원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인간의 유한한 시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신천지가 펼쳐질 것이다. 그곳은 5차원이나 혹은 6차원의 세계일까? 선으로 이루어진 1차원의 세계와 면으로 각이 진 2차원적 세계를 거쳐 입체가 빚어내는 3차원의 세계를 통과하면 4차원의 세계가 나타나듯이.

 

 3차원의 세계에서 공간이동을 감행한 인간은 시간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 4차원의 세계에 닻을 내리지만 그 세계엔 미래가 저장돼 있기에 매 순간 변화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하지 못하고 붙박이처럼 고정되는 순간 인간은 시지프스의 일생처럼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일에 매달리고 만다.

 

 안치환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맥을 충실하게 이어가야 하는 사람이고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는 그 색깔이 다른 동물원의 전통을 따라가야 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그렇다고 쌍둥이처럼 한날한시에 태어난 운명 공동체는 아니었다. 그들이 선택했던 길은 그러하기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차이가 오히려 그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김광석은 죽었고 안치환은 살아있다. 안치환의 행로에 김광석이 모두 다 들어앉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지점에서 그 둘은 하나가 된다. 김광석은 그의 몫을 안치환에게 주고 갔다. 안치환은 김광석의 그림자를 떠맡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 안았다. 안치환의 노래엔 김광석의 숨결이 녹아있다. 안치환의 어깨와 등허리에 김광석은 찰싹 달라붙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안치환과 김광석은 짝패인가. 그들이 짝패라면 그것은 너무나 희귀해서 앞으로는 그 어디에서도 접하기 힘든 드문 사례로 남을 것이다. 김광석은 안치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김광석은 안치환이다, 라고 말하는 순간 김광석은 안치환이 아니고 김광석이 된다. 반대로 김광석은 안치환이 아니라고 말해 버리면 김광석은 안치환의 옷을 껴입게 된다. 그들은 따로 또 같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안치환은 언제나 죽음 쪽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다. 안치환과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록 밴드 자유 그리고 김광석과 그를 기리기 위해 윤도현을 위시한 네 명의 젊은 포크 싱어들이 모여 만든 김광석 프로젝트 역시 이들의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바가 있다.



  2. 마음의 고향

 

  함세덕의 <동승>은 <도념>이라는 제목으로 1939년 삼월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 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입상한 그의 대표적인 단막극으로 그해 오월 유치진의 연출에 의해 극연좌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1949년 당대의 여배우 최은희가 어머니 역을 맡아 <마음의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희곡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장선우의 영화 <화엄경>에 등장하는 선재동자처럼 어머니의 얼굴도 모른 채 산사에서 자란 ‘도념’이라는 동자승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지막엔 그의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극의 줄거리를 인물의 등, 퇴장에 따른 시공간과 사건의 변화에 따라 장면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안대가집 재 올리는 상황이 제시되고 초부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도념의 말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재 구경 오는 여자들인 새댁과 과부를 통해 안대가집 아씨가 설명되고 이와 함께 도념의 어머니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재 구경 오는 남자들인 총각과 노인을 통해 도념에 관한 정보가 제공되며 도념은 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인수의 등장으로 토끼 덫을 쳐 놓은 도념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난다. 속세에 대한 도념의 그리움이 강조되고 도념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가 보다 구체적으로 제공된다. 미망인은 도념을 양자로 맺고 이에 대한 허락을 스님께 구하고자 한다. 도념은 서울에 가게 됐음을 기뻐하여 이 사실을 초부에게 알린다. 그리고는 토끼 덫을 확인하러 비탈길을 내려간다. 주지는 도념을 데려가고자 하는 미망인의 요구를 반쯤 허락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친정어머니에게 알리려고  한다. 도념이 토끼를 잡은 사실이 주지에게 발각되지만 초부의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 장면을 본 초부의 아들 인수는 사실을 발설하려다가 초부에 의해 떠밀려 내려간다. 주지는 도념에게 서울로 가서 살 것을 허락하며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한다. 인수가 갑자기 등장하여 그 동안 도념이 토끼를 잡아 법당에 숨겨놓은 사실을 폭로하자 주지는 이를 확인하러 급히 원내로 들어간다. 미망인이 등장하여 도념이 인수와 싸우는 것을 말리고 잠시 두 사람은 서울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곧 이어 미망인의 친정어머니와 참예인들이 원내에서 등장하여 도념의 토끼 살생을 알린다. 주지가 도념에게 살생의 이유를 다그치자 도념은 목도리를 만들어 어머니를 드리려고 했다고 말한다. 주지는 다시 재를 지내도록 한다. 도념은 비로소 주지의 권위에 도전한다. 어머니에 대한 비난에 반대하며 주지의 가르침에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도념은 미망인에게 매달리며 미망인도 도념을 데리고 가려하나 주지와 친정어머니는 절대로 불가함을 선언한다. 결국 미만인도 포기를 하고 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운다. 도념은 마지막 종을 치고 산을 떠난다. 나무하기를 마친 초부와는 다른 길로 산을 내려간다.   

  - 양승국, <동승>의 공연 텍스트적 분석 -

 

  물론 이 기본적인 이야기의 뼈대에 살을 붙이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작품 속에는 등장한다. 도념의 그리움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실체화된 서울에서 내려온 미망인과 인간적인 평범한 어른의 입장에서 미망인과 도념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는 중간적 존재로서의 주지 스님 그리고 도념의 슬픔과 고통을 담담하게 들어주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에 해당하는 상좌승 정심과 초부가 그들이다. 그리고 도념이 미망인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무산시켜 버리는데 일조하는 초부의 아들인 인수가 그렇다. 그러나 결국 이 희곡은 외면적인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보다는 사미승인 도념의 내면적 갈등, 다시 말해서 극중 주인공이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결핍과 상실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 결핍과 상실의 모티프는 작품의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있다. 가령, 인수와 동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서, 하얀 소복을 입은 수심이 가득한 미망인의 얼굴에서 또 어머니에게 목도리를 선물하기 위해 토끼를 죽이는 도념에게서 심지어는 작품의 첫머리와 말미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염불 소리, 범종 소리에서도 이 패턴은 반복되고 있다.

 

 현상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도념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한 ‘세계’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부재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도념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가 없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도념에겐 처음부터 ‘無’의 개념에 가까웠던 셈이다. 가까이 있는 것 그래서 늘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것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먼 것, 멀어진 것, 멀리 있는 것 그리하여 내 곁에서 영영 사라져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의 대상이다. 도념의 동경과 갈망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서울에서 내려온 미망인이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머니의 대리자’에 불과할 뿐 도념에게 변함없는 모성으로 인지되는 ‘담지자’로서 다가서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의 맥락에서 미망인 역시 현존하지만 부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도념이 그리는 어머니의 존재는 어린 사미승의 관념에서만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잔상은 늘 도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순례의 혼령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에게 말을 붙이고 그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그를 괴롭힌다. 어머니는 부재하지만 결국 현존하는 것이다. 부재로서의 현존, 현존으로서의 부재. 그것이 함세덕의 <동승>에 나타난 현상학적 차원에서의 철학적인 메시지이다.    

 

  도념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가 한 ‘세계’라고 가정을 해볼 때 ‘문제적 개인’에 해당하는 ‘나’는 ‘세계’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화한다. 세계와 소통하고 그를 향해 나를 열어젖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후설의 개념에 의지하자면, 현상학적 환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 까닭은 명약관화하다. 메를로퐁티의 말대로, 나는 대상을 지각하지 못하고 대상을 지각하지 못한 나는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념에게 어머니는 의식에 의해 정립되거나 지향된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끼고 반응할 수가 없고 다만, 머릿속으로만 그려볼 뿐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념의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주체와 대상, 정신과 사물이 분리된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손을 내밀면 다른 한쪽이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움츠러들거나 물러선다. 그것이 또한 근대 철학의 숙명이자 비극이다. 그러나 이미 세계의 전면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나는 그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세계’와 ‘나’의 합일, ‘나’와 ‘세계’의 조율을 위해서 길을 떠나야하는 것이다. 그 순례의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다. 그것은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편입해 가는 인간의 통과제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도념은 이제 길 위에 선 것이다.

 

  서양철학의 현상학적 경향은 [반야심경]이나 [도덕경]과 같은 동양의 정전에서도 그대로 그 모습을 되비추고 있다. 동양의 경전에서는 세계가 서로를 안고 있는 상태, 서로가 서로를 낳는 상태를 가리켜 “부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다. 있음으로의 없음, 없음으로의 있음에 대한 이와 같은 화두는 [노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똑같은 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도를 도라 하면 늘 같은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같은 이름이 아니다.” 바슐라르는 이를 “꿈으로 장식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가지도 없다”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빌려 꿈의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물질적 상상력과 결부시켜 독특하게 해석해내고 있다. 바슐라르의 말에 의지하자면 상상은 어떤 마약보다도 강력한 마약이다. 생은 그 자체로 순진무구하기에 사람의 마음이 현악기의 줄과 같아서 스치면 소리를 내고 울듯이 진심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초겨울,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고찰의 산문을 빠져 나와 그의 어머니를 찾아 비탈길을 내려가는 어린 사미승의 눈에 들어온 첫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마도 속세로 내려가는 첫 순간 이미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는 길이 실은 시작도 끝도 없는 먼 여행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여행길에 오르는 순간 그는 이제 다시는 영영 예전에 그가 머물던 유년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행은 어쩌면 안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초부: 아니, 너 갑자기 바랑은 왜 걸머지고 나오니?

  도념: 이번 가면 다신 안 올지 몰라요.

  초부: 왜? 스님이 동냥 나가라고 하시든.

  도념: 아, 아니요. 몰래 나갈려고 해요.

  초부: 이렇게 눈이 오는데 잘 데두 없을 텐데 어딜 간다구 이러니? 응, 갈곳이 있니?

  도념: 조선 팔도 다 돌아다닐 걸요, 뭐.

  초부: 하 얘, 그런 생각 말구, 어서 가서 스님 말씀 잘 듣구 있거라.

  도념: 벌써 언제부터 나가려구 별렀는데요?

         그렇지만 스님을 속이고 몰래 도망가기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못 갔어요.

  초부: 어머니 아버질 찾기나 했으면 좋겠지만 찾지두 못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없구,

          거지밖에 될 게 없을 텐데 잘 생각해서 해라.

  도념: 꼭 찾을 거예요.

         내가 동냥 달라구 하니까 방문 열구 웬 부인이 나를 한참 바라보구 있더니

         별안간 ‘도념아. 내 아들아, 이게 웬일이냐’  하구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 내려오던 꿈을 여러 번 꾸었어요.



  3.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최인훈의 희곡 속에 의도적으로 명시되어 그것이 무대 위에 형상화될 때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비언어적인 연극언어에 해당하는 소도구들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 그 소도구는 거울이었고 심청의 손에 들려있던 거울은 연극을 보러 온 관객에게 거울이 상징하는 메타포들, 이를테면 만남과 헤어짐, 기다림의 정서 같은 것들을 환기시킨다. 거울은 또 하늘에도 걸려있다. 하늘에 걸린 또 하나의 거울인 달을 바라보면서 심청은 헤어진 남편이나 아비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의 이치, 분명하게 실행되는 자연의 섭리와는 다르다.

 

 만해 한용운의 시구처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간사의 보편적 법칙이지만 심청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기약이 없기에 그 기다림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미래가 없는 기다림, 전망이 없는 기다림, 실현 가능성이 없는 기다림이기에 늙고 병든 심청은 제 품속에서 깨어진 거울을 꺼내들고 스스로 교태를 지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거울의 기능을 1977년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에 발표된 세 번째 희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에선 탈이 대신하고 있다. 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종이, 나무 등으로 만든 얼굴의 모양이고 그 얼굴을 감추려고 뒤집어쓰는 물건이며 서양에선 가면이나 마스크가 가지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이를테면 탈은 진짜 얼굴은 숨어있고 그것을 대신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가짜 얼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탈은 그러하기에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의 소통을 위해 탈을 쓴다고 할 때 그 탈은 이미 밝히기 위해서 가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우리는 탈을 사용하는가.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일 것이다. 남들에게 내보이기 싫은 아픈 상처나 부끄러움을 숨김으로써 그러한 수치심이나 치욕을 잊고 살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탈은 어떤 의미에서 그 뒤에 숨고 싶은 심정을 대변한다. 다시 말하면 땡볕 같이 따가운 현실을 조금이나마 피해갈 수 있는 작은 그늘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혹은 그러한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처는 내면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외면적인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다. 몸의 어느 한구석이 망가진 불구적인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탈은 몸의 병듦, 몸의 아픔, 몸의 불구성을 암시한다.

 

 어미는 문둥이다. 문둥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인 사람의 뼈와 살이 썩고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운 흉물이다. 달내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눈도 없고 눈썹도 없고 코도 입도 귀도 없는 맨숭얼굴”이며 “사람이 아닌 달걀귀신의 모습”이다. 마음은 사람이지만 몸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그 뒤틀리고 허물어진 몸의 일부분,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어미는 탈을 쓴다. 탈을 써서 몸의 아픔, 몸의 병듦을 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시적이나마 몸의 아픔은 잊었을지언정 마음의 아픔, 마음의 고통은 그대로 남아있으므로. 그러하기에 그는 밤이면 밤마다 자식과 남편이 기거하는 오막살이를 찾아간다. 오막살이를 찾아가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방안에는 그가 사랑하는 남편, 못 견디게 보고 싶은 자식이 있다.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몸이 불구인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마음의 문까지 차단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는 어떠한가. 그는 선천성 말더듬이다. 그도 역시 정상인이 아닌 불구이다. 하지만 그의 불구는 어미에 비해 그 증상이 가볍다. 적어도 사람의 온전한 모습을 잃어버린 괴물은 아닌 것이다. 아비는 자식이 제 어미를 만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미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식은 정상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자연스러운 의사소통과 정의 교감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나 그는 몸이 병든 자신의 아내를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아비의 사랑과 남편의 사랑 사이에서 그는 갈등한다. 마음이 아프다. 마음만 아플 것인가. 마음이 아프기에 몸도 따라 아프다.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아니, 어미의 경우처럼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것인가.

 

 달내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 싶다. 집을 나간 어머니. 그러나 달내의 기억 속엔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어머니를 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머니와의 재회는 달내의 꿈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하기에 달내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바우의 마음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달내의 이런 처지를 모르는 바우는 들끓는 사랑의 열병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바우가 달내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을의 사또는 달내를 소실로 맞아들이려 한다. 포교의 강압이 점점 심해지자 달내의 아비는 달내와 바우를 짝지어 도망시키려 한다. 그러나 달내는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떠나기 하루 전날에서야 달내는 아버지가 집에 남으려는 까닭을 알게 된다. 아비는 그의 아내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비녀를 건네주는 아비에게서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깨달은 달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비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밤 깊어서야 겨우 잠이 든 달내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산불이 나고 어미는 달내를 구하려다 조막손이 된다. 그것은 달내가 어렸을 때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다. 달내가 꿈을 깬 후 곧 어미가 나타난다. 어미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멀리 가려한다는 결심을 알리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 순간 달내는 말리는 아비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 나가 어미의 손을 끌고 들어온다. 그 모습을 멀리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바우. 바우 역시 그의 장모 될 사람이 문둥이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국 몸이 병든 어미는 마음이 아프고 그 마음 아픔은 자신의 남편과 자식과 그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이어진다. 가족은 한곳에 모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아비와 어미와 달내와 바우는 다같이 함께 모여 살 수 없다. 정상적인 가정을 꾸밀 수 없다. 왜냐하면 어미의 병은 저 혼자만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의 보이지 않는 길처럼 전염성이 강하다. 네 사람이 한식구가 되기 위해선 몸이 병들지 않은 나머지 세 사람이 육체적 불구가 되어야 한다. 어미처럼 한평생을 문둥이라는 몸의 부자유스러움과 괴로움이 주는 시련을 감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모두가 몸의 불구가 되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이 어쩔 수 없이 서로 헤어진다면 그들은 또 다른 한평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만날 수는 없는 마음의 불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의 결말은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감동적이다. 장소는 더 깊은 산 속. 시간적 배경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 온갖 짐승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가운데 머리수건을 한 사내 하나와 여자 둘이 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그들 곁으로 다가간 짐승들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도깨비라고 소리치며 달아난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달내와 그의 아비, 어미인 것이다. 잠시 후 등성이 너머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더니 한사람의 남정네가 또 나타난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달내를 사랑했던 바우다. 네 사람은 문둥이가 되면서 비로소 한 가족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완성을 위해 몸을 버린 것이다.

 

 최인훈의 희곡은 대개 삶의 본질적인 문제, 근원적인 문제라는 관점에서 일상생활이나 사회현실을 해석하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는 민중상을 슬픈 문둥이의 이야기로 부각시킨다. 다른 작품들처럼 뚜렷한 설화가 소재로 되어있지는 않지만 항간에 떠도는 문둥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적 민중의 애환을 역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소리를 극소화시키고 침묵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서 보여주었던 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강화시켰다. 이러한 정적인 분위기는 나아가서 자연회귀 사상으로 이어져 완전한 십장생도를 구현하고 있다. 깊은 산 속에서 짐승들과 하나가 되어서만이 인간세계에서 얻지 못한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실로 “한국인의 슬픔과 아픔, 아름다운 사랑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바로 질기고 질긴 연과 운명을 노래한 서사시”라는 국문학자 유민영의 평가처럼 민중적 한을 화해로 승화시키며 전통적 십장생도의 이상향을 펼친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조신설화를 바탕으로 배창호가 연출한 영화 <꿈>에서처럼 사랑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주제로 형상화된다. 이 희곡은 한여름 달내가 밭에서 김을 매고 그 옆에서 바우가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해서 가을과 겨울을 거치고 난 후 다시 봄이 되어 네 식구가 김을 매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네 사람이 한 가족이 되는데 걸린 시간은 일년 정도이다. 최인훈의 다른 희곡과 마찬가지로 이 일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사랑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 이를테면 고을 사또로 대변되는 권력의 억압이라든지 바람소리로 상징화된 대자연의 광포함을 극복하기 위한 통과제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을 무사히 치러냈을 때 작품의 등장인물들에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는 몸은 비록 정상이 아니지만 온갖 신명과 노래와 춤이 터져 나오는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이다. 그 세계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산 속의 짐승들까지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잘 살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이다.

 

 시인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세계는 “귓속에 복숭아꽃 피고 노래가 마을이 되는 나라”이며 “어지러움이 맑은 물 되어 흐르고 그 흐르는 물 따라 불구의 팔다리도 함께 흘러가는 곳”이며 “죽은 사람도 다같이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잔 권하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이다. 그것은 시인 이성복이나 작가 최인훈이 꿈꾸는 세계이자 연극이라는 무대 위에서 달내와 그의 가족들이 이루어낸 세계이며 또한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우리들 각자가 지향하고 만들어가야 할 그런 세계이다. 조화롭고 화해로운 그 세계에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환한 빛들이 넘쳐흐를 것이다. 그 가깝고도 먼 곳으로 우리 모두는 가고 싶은 것이다.          



  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 미술관에 간다. 한국일보사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타면 국립중앙박물관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조선의 궁전 경복궁을 끼고 푸른 기와집인 청와대를 뒤로 돌아 평창동으로 가는 길 중간에 북악산 밑의 아담한 동네 부암동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에서 버스를 내려 동사무소 옆의 아리랑고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가 도심 속의 시골인 뒷골마을의 예스러운 정취나 기차바위가 있는 인왕산 정상의 어질어질한 산책로를 밟을 수도 있지만 나는 집과 집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 환기 미술관에 간다. 환기 미술관에 가는 날은 늘 혼자였다. 어떤 날은 비가 왔고 어떤 날은 눈이 내렸고 또 어느 날은 바람이 불었다. 어느 날은 휑하게 뻥 뚫린 가슴 한가운데로 지금은 얼굴조차 가물가물한 희미한 옛사랑이 찾아들었고 어느 날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지나간 상처가 불현듯 솟구쳐 올라 온몸을 일시에 마비시켰으며 또 어떤 날은 하루하루를 기적처럼 버티어 나가는 막막하고 아득한 현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 모든 기억의 지층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그리하여 꽃 피고 새 우는 오월이 오면 나는 환기미술관에 간다. 백화난만(百花爛漫)한 북악의 그늘 아래로 흘러, 흘러간다. 광화문이나 덕수궁 앞에서 출발하는 미술관 순회버스를 타고 가는 게 아니라 꼭 한국일보사 맞은 편 백상기념관 옆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타고 간다. 호암 갤러리와 로댕 갤러리, 금호 미술관과 일민 미술관과 시립미술관 그리고 프랑스 문화원을 거쳐서 가는 게 아니라 오직 환기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만 차를 탄다.   

 

 수화 김환기의 작품 중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1951년 작 <피난열차>이다. 장난감 같은 열차 몇 칸에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 숫자가 인상적이었던, 그러나 그때는 그 그림에 한국동란 당시의 비참한 현실이 녹아있다는 사실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작품 자체가 어린이가 커다란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로 쓱쓱 그려놓은 그림처럼 워낙 단순하게 처리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난열차>를 포함한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그의 그림은 유영국이나 남 관의 작품처럼 대부분 추상회화에 가깝다. 혹은 김창렬의 <물방울> 연작과 이응노의 <문자 추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우환의 점과 선 이미지와 이종상의 원형상에 하인두의 색의 광채가 겹쳐질 때도 있다. 박서보의 <묘법>과 서세옥의 <군무>가 일으키는 마음의 떨림을 수화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항아리 연작이나 산과 구름과 달과 새가 주로 등장하는 추상화된 자연은 그저 모호한 추상이 아니라 그 속에 분명히 한국적인 숨결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른 추상회화들을 볼 때만큼 어렵지가 않다. 그 대신 한 작품을 살피더라도 찬찬히 뜯어보아야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작품의 본질과 만날 수가 있다. 어렵지가 않다고 해서 깊이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환기는 키가 크고 목이 긴 학과 같은 풍모에서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인 김우창을 떠올리게 하고 선비적인 품격을 타고났다는 점에서는 남산골샌님 같은 딸깍발이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을 닮았으며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장구통을 둘러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 한가락을 뽑을 줄도 아는 풍류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시인 황동규를 연상시킨다. 또 그림뿐만 아니라 문인들 못지않게 글을 잘 썼다는 일화를 들어보면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문인 화가 김병종의 삶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는 일찍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 수업을 마친 뒤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을 거치고 난 후 다시 파리로 건너가 서양의 아방가르드적이고 자유분방한 모더니즘의 지적 세례를 톡톡히 받고 돌아왔다. <론도>와 <창>, <메아리> 같은 작품이 일본 유학 시절의 김환기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면 동경에서 돌아온 후인 1948년 동료였던 유영국, 장욱진 등과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의 작품들이 바로 한국적 자연의 추상화 결과인 <산>과 <나무와 달> 연작들이다. 부산 피난 시절의 궁핍했던 주변 환경은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천지가 쑥대밭이 된 세상’이자 ‘반가운 친구를 반갑지 않게 대했던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세월’이었지만 이 시기에도 그는 줄기차게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새와 항아리>나 <항아리와 여인> 등의 작품들과 <판잣집> 같은 그림들이 이 때 탄생했다.

 

 그는 한국의 산수 외에도 유난히 우리 도자기에 매료됐는데 그래서 그의 성북동 집 마루엔 그가 수집한 그릇들이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자기인 백자나 청자 항아리에서 여인의 둥근 곡선과 부드러운 체취를 느꼈던 탓일까. 한국의 산과 들, 하늘과 바다 중에서도 후기로 갈수록 달의 이미지가 불쑥불쑥 등장하는 것도 그와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은 듯싶다. 그는 체질적으로 강하고 날카로운 것보다 유하고 섬세한 쪽에 더 기울어진 예술가였다. 그러한 성향은 그가 밖으로 나가 활동했을 때 더 직접적으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                         

 

  얼마 전에 작고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했던 미학자 조요한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일러 ‘아름다운 자연과의 화합과 탐색’이라 이름 붙였지만 파리 시절과 뉴욕 시절의 김환기의 작업은 어쩌면 조국의 산천으로부터 유리된 고독하고 쓸쓸한 자기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이었을 거라 짐작된다. 모든 것을 접고 오로지 창작활동에만 매진한 그의 고난의 행군은 1970에 제작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언젠가 그의 전시회에서 직접 보고서 어떤 우주의 무한한 영원에 대한 충만감에 젖어들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이산 김광섭의 시 제목이기도 하고 작가 최인훈의 희곡 제목이기도 한 이 작품은 우연과 필연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인간의 운명적인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이나 작가의 작품 역시 그러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 출발한 그의 범우주적인 작품 세계는 이후 <10만개의 점>과 <고요>로 치달으면서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 깊이는 상처의 내면화에서 얻어진 인생의 깨달음과 상응하는 것이었으리라. 낯설고 물선 이국의 땅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를 줄기차게 괴롭혔던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모국에 대한 향수였다. 삶과 예술 양쪽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던 그도 만년엔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그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은 아닐까. 그때 그에게서 세속적인 성취와 화가로서의 명성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나가고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평범한 자연인으로서의 진실로 인간적인 형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임종의 순간까지 희망을 품지 못하고 눈을 감았는지도 모른다. 그와 교우했던 이중섭의 가난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됐다면 수화의 가난은 정신의 아픔에서 오는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5.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 거리에 가고 싶었다. 남 제주 서귀포의 어디쯤 그의 이름을 딴 낡고 허름한 양철 지붕의 식당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 거리에서 질투와 시기와 의심과 원망에 절은 남루한 내 몸을 훌훌 털어 내고 싶었다. 박하 향의 비누 냄새가 나는 맑은 물로 넝마처럼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것이다. 가난한 자는 영영 그러할 것이다. 가난한 자는 말이 없다. 춘궁기라는 옛말처럼 봄마다 나를 뒤쫓아 오는 그를 피해서 나는 달아난다. 채석강의 절경이 보는 사람의 혼을 빼놓는 부안 근방의 내소사 말고 경주에서 한 시간이나 차를 타고 나가야 드디어 눈앞을 환하게 적시는 감포의 서늘함도 아니고 동백꽃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헛걸음한다는 고창의 선운사는 말할 것 없는 삼무와 삼다의 섬으로 가고 싶었다. 안면도와 홍도와 소록도와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은 아예 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섬, 부산이나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지만 옛 지명이 미추홀이었던 인천에서도 여객선이 왕래하는 머나먼 탐라의 섬, 그곳으로 가는 길이 멀고 아득해서 그곳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환상 속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섬 중의 섬. 그 섬으로 가고 싶었다. 그 섬에 가서 제주라는 이름은, 이어도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내 환상 속에 남아있는 고립무원의 외딴 섬에 정착해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싶었다. 도둑과 거지와 대문이 없고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는 그 섬은 이제 내게 별다른 의미가 없고 오직 화가 이중섭이 머물던 땅이라는 울림만이 가득한 곳. 제주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한 해의 마지막을 제주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암울하게만 느껴지던 그때, 나는 그곳의 한 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던 고향 선배의 자취방에서 보름간을 먹고 자면서 그야말로 한량처럼 뒹굴었다. 제주의 겨울바다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고기잡이배에서 흘러나오는 집어등(集魚燈)의 불빛이 사람의 마음을 홀랑 뒤집어놓던 그 섬의 밤바다는 뭍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상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렇지,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찾아오는 아픔에도 두렵지 않겠구나. 절망의 극한에 서 본 자들은 오히려 그 어두운 터널 속에서 무덤덤하거나 담담해지는구나. 바닷가에서 해초와 게를 주워 삶아먹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이중섭이 깨달았던 것은 체념의 어떤 경지였을 것이다. 그는 그 비참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부인 남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세상은 언제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오.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본들 결국 우리 생각대로 조건이 좋아지는 것은 아닐 거요. 또 무슨 다른 사정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마음이 정해지거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태도요.” 그는 결국 생활고를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불행했던 삶을 마치게 된다. 러시아의 대 문호였던 레오 톨스토이처럼 무연고자로 처리된 채 쓸쓸하게 눈을 감고 만 것이다.

 

 유배생활이나 다름없었던 그의 제주생활을 짐작케 해주는 <제주도 풍경>이나 <바닷가의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같은 작품들은 그러나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비참한 생활과는 딴판인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환하다. 밝고 환하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면 귀엽고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까. 아이들과 부인이 굶주려 해골만 남은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화 작품 말고도 은지화나 엽서에 그려진 다른 작품들에도 이러한 해학성이 짙게 묻어나고 있다.

 

  그는 아마 우리나라의 미술인들 중에서 박수근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친근한 화가일 것이다. 시인 고 은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젊은 미술평론가 전인권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도 화단을 뛰어넘어 예술계 전반으로 확산되어 쏟아지고 있는 상태다. 꿈틀대는 생명력의 약동이 화폭 전면에 흘러넘치는 <흰소>나 <황소>, <싸우는 소>, <용을 쓰는 소>를 비롯한 <소> 연작들과 <달과 까마귀>, <부부>, <투계(鬪鷄)>와 <가족> 연작들은 누구나 한번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작품들이다. 그가 소만큼 많이 그린 짐승은 닭과 새이며 그에 못지않게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모습도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또는 그 둘이 서로 어울려 노는 장면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이 조화롭게 서로가 서로를 감싸듯이 안고 있는 평화로운 정경이 그의 작품세계의 주요 테마이다. <닭과 어린이>라든가 <물고기와 아이들>,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봄의 어린이>, <도원(桃園)> 같은 그림들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을 구별 짓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들 모두가 대자연의 품안에서 원을 그리며 둥글게 돌아가고 있다. 마치 순환하는 사계의 흐름처럼 말이다.

 

 김환기의 그림을 추상적인 동양화라고 한다면 그와 비교하여 이중섭의 작품은 구상에 가까운 동양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환기나 이중섭의 작품에는 공히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면면이 눈에 띄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표제를 단 여러 작품들 가령 절친한 벗이었던 시인 구상의 단란한 한 때를 포착해낸 <K씨 네 가족>과 <춤추는 가족>, <아버지와 두 아들>을 보라. <부부>가 하늘과 땅으로 대변되는 대자연의 인간적 결합이라면 가족에 관계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뼈와 살로 구성된 따뜻한 피가 맴도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가 그린 <가족> 연작의 대표작은 <길 떠나는 가족>이다.

 

 76극단의 실험성이 강한 중견 연출가 기국서와 연희단거리패를 이끌고 있는 이윤택에 의해서 연극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던 동명의 이 그림은 어찌 보면 화가로서의 그의 일생을 축약시켜 정리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소가 끌고 있는 달구지에 올라탄 가족들, 아내는 젖가슴을 드러내 놓은 채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 앞쪽에 자리 잡은 아이는 복숭아 열매를 들고 서 있고 뒤에 앉아있는 아이는 비둘기처럼 보이는 새와 해찰을 하고 있다. 소의 고삐를 쥐고 있는 작가 자신의 분신인 듯싶은 맨 앞의 사내는 뒤를 돌아보며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났는지 왼쪽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린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어디론가 소풍을 가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을  흰 구름 한 조각이 무심코 내려다본다. 구름도 흐르고 그 구름처럼 사람의 인생도 흘러간다는 암시일까. 아니면 인간의 삶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라는 의미일까.

 

 작품 속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이중섭 일가의 방랑은 실은 내일의 일을 짐작하기 힘들만큼 막막하고도 막막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천형처럼 자주 이사를 다니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리라. 나는 화창한 봄날,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무 걱정 근심 없다는 듯 한가하게 나들이를 나온 듯한 이 흥겨운 작품 속에서 조선팔도를 부초처럼 헤매다가 결국은 뭍에서도 안식처를 구하지 못하고 남해의 한 섬으로까지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한 가족의 현실적인 고달픔과 삶의 비애를 역설적으로 훔쳐본다. 길 떠나는 가족의 앞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도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마치 길 위의 인생이 그들에게 부여된 숙명이기나 한 것처럼 그렇게 그들은 가고 또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희망도 없이, 헛된 기약이나 예정도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은 그러하기에 쓸쓸하고도 쓸쓸하다. 그러나 머물지 못하는 삶이 인간에게 주어진 섭리 같은 것이라면 정든 곳을 등지고 뒤돌아서야만 하는 모든 길 떠나는 이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만은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6.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눈앞이 아득해오는 밤

  해지는 풍경으로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박혜정 시, 안치환 곡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알고 있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들 몇몇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라는 가수가 이 땅 위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여전히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만의 길을 고집하고 있는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를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봤을 때 나는 막 대학이라는 사회에 발을 내딛은 새내기 신입생이었다. 신입생이긴 했지만 재수, 삼수라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온 뒤였기에 몸과 마음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넋 놓고 지내던 겉늙은 학생이었다. 무엇 하나 내 맘대로 될 것 같지 않던 그 무기력한 시절, 방송국 선배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한 여자대학교의 강당에서 그는 노래를 하고 있었다. 단순히 운동권 학생들의 과격한 노래로만 생각했던 <철의 노동자>와 <잠들지 않는 남도> 같은 민중가요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도 울렁거리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당달봉사가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의 팬이 된 사실을 지금까지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PD가 되어 음악프로를 직접 제작하게 됐을 때는 학전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던 그를 무작정 찾아가 인터뷰하기도 했었다. 공연 중간의 휴식시간을 틈 타 잠시 무대 뒤로 나온 그는 아내에게 안겨 칭얼거리고 있던 아기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고 아름다웠다. 그 거짓 없는 평화로운 웃음엔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저항 가수로서가 아닌 자신의 가정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한 평범한 아버지의 얼굴이 선연하게 녹아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연세대에서 열렸던 이한열 열사 추모제 때는 부스스한 머리에 충혈 된 눈을 하고 <마른 잎 다시 살아나>와 <자유>를 불렀었다. 그때 그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평소 같지 않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한열은 대학 시절 그의 친구였다.

 

 언젠가는 광화문 야외무대에서 열린 새 천년을 맞이하는 축하 음악회에서 도무지 자신의 음악적 성향과는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후배가수들 틈에 끼여 <소금인형>과 <당당하게>를 그야말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창했었다. 마치 그렇게 혼신을 다하는 것만이 그 자리에 선 가수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간직한 것처럼.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하루하루를 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대지주의 섬약한 막내아들로 태어나 청년시절 일찍이 좌익사상에 눈을 떴지만 결국 삶이 부여하는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39세의 젊은 나이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는 유서를 남기고 강물에 투신자살한 <사양>과 <인간 실격>의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 사양족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전후 일본 사회에 선배 작가였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뒤를 이어 사라지는 아름다움을 위한 진혼곡을 울렸던 그처럼, 아니 그와는 달리, 태어난 그 자체가 미안했던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지 못하는 내가 미안했다. 가수라는 공인이기 전에 그는 나를 늘 반성하게 만들고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언제나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한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숨 가쁘게 변한다고 해도 늘 제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 줄 것만 같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늙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처럼 깨어있는 노래하는 청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나 <귀뚜라미> 그리고 안치환이라는 가수를 대중들 사이에 분명하게 각인시킨 <내가 만일> 같은 곡들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고 싶지는 않다. 그 노래들은 모두 훌륭하고 뛰어난 곡들이지만 그의 음악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들은 오히려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나 <저 창살에 햇살이>, <철망 앞에서> 같은 노래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치환은 그러한 곡들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생명력이 돋보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시절의 그와 늘 겹쳐지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이나 꽃다지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리고 저 엄혹했던 80년대의 빛나는 문화유산들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 안혜경이 작곡한 신경림의 <햇살(민주)>, '꽃등 들어 님 오시면'의 민요 가수 정세현의 노래로 알려진 양성우의 <꽃상여 타고>, 이봉신과 문승현 콤비의 <영산강>, 한동헌의 <신개발 지구에서>, 작사자와 작곡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서지지 않으리>와 <이 세계 절반은 나>와 <친구에게> 그리고 최성각이 따로 그의 짧은 소설에서 그 내력을 소상하게 밝혀 한때 지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가슴 절절한 파르티잔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부용산>을 청바지에 통기타를 매고 나와 아무 거리낌 없이 부를 때 그는 진짜 안치환이 된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팬들은 별다른 장식 없이 맨몸으로 부딪치는 그 자유롭고 당당한 모습에 항상 매료당하는 것이다. 안치환은 그의 6집 앨범 표제처럼 아직도 믿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소리 소문 없이 변하고 있는 이 부박한 시대에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는 진정한 용기인 것이다.         

 

  그는 또 여러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자신의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80년대 초 신춘문예로 등단해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 안재찬으로 주목받다가 지금은 구도자로서 여행가의 삶을 새로 살고 있는 류시화나 90년대 생태 시로 여성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나희덕 그리고 7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지금은 수많은 애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정호승 같은 시인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신동엽이나 김남주, 신경림과 황지우의 시들도 그의 손을 거쳐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특히 그는 김남주의 많은 작품들 가령 <산국화>나 <지는 잎새 쌓이거든>, <물 따라 나도 가면서> 계열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시들뿐만 아니라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와 <똥파리와 인간>과 같은 체재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시들을 노래로 만들고 생전에 시를 낭독했던 시인의 육성을 그대로 자신의 앨범에 재현해내기도 했다.

 

 김남주의 유고시집에서 빌려온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2000년 새봄에 발매된 그의 최신 앨범은 “어두운 시대 불꽃처럼 살다 가신 김남주 시인께, 음악적 영감과 노래의 바른 길을 깨우쳐 주신 그 분께, 어른의 눈빛이 그렇게 맑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그 분께 이 음반을 바칩니다."는 음반 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온전히 그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진심으로 존경하는 위대한 한 시인을 위한 헌정 작품집이다. 김영현이 <남해로 가는 길>에서 절친한 동료였던 지리산의 시인 고정희와의 추억을 되살렸던 것처럼 김남주의 인간적인 삶 역시 문단 후배였던 소설가 방현석이나 이남희 등에 의해서 [내가 만난 김남주]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형상화되기도 했었다.

 

 대학방송 시절 내가 평소에 그 삶을 좋아했던 한 후배는 안치환의 노래 중에서 유독 1집에 실렸던 <그곳으로>를 즐겨 틀었었고 나는 같은 음반에 실린 시인 하종오의 시에 민족음악연구회 출신의 제 3세대 작곡가 이건용이 곡을 붙이고 전경옥이 노래했던 <그렇지요?>와 <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남몰래 사랑했지만 그의 노래로서가 아니라 그 전에 송숙환이 어디선가 애절하고 사무치는 음성으로 불러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에 더 마음이 가 닿곤 했었다.

 

 송숙환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10주년 기념음반에서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사랑할 수 없는 것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지 못할 것 용서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래’인 그 서정적인 발라드 <맹인부부가수>를 애틋하게 불러주고 있다. 그의 노래는 가장 감성적인 것이 또한 최상의 이성적인 부분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령, 송숙환 외에도 정중동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문대현과 문승현이라는 걸출한 작곡가와 김창남과 이영미라는 뛰어난 이론가를 배출한 메아리 출신의 서늘하면서도 귀기 어린 가수 윤선애의 노래극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에 삽입됐던 <저 평등의 땅에>와 미래를 예언하는 담지자의 그것처럼 투박하면서도 섬뜩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김세진, 이재호 열사를 추모하는 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 같은 노래패 출신인 조경옥의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나 환경과 여성의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안혜경의 <어머니 말씀>과 <침묵의 봄>, 한 돌의 <갈 수 없는 고향>으로 이미 그 바닥에선 유명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멤버인 박미선의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서글픈 목소리에 얹혀 소개됐던 김소월의 시 <기도>, 김은희의 <동지를 위하여>와 <진달래>, 낮고 여리고 섬세한 것이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한 노래마을 출신 주경숙의 <우리들의 사랑법> 그리고 김호철이 곡을 붙인 박노해의 시 <민들레처럼>를 멋지게 소화했던 노래공장의 일원 장희경, 두 대의 피아노를 통한 기가 막힌 연탄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클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던 민족음악연구회 출신의 연주자 이민주, ‘살아남은 자에게 혁명을’이라는 모토를 내걸었던 젊은 록 그룹 메이데이와 러시아의 중앙기관지에서 그 이름을 빌려온 이스크라와 <열사와 전사에게>, <청계천 8가>로 일약 민중음악계의 새 희망으로 주목받던 천지인의 눈부신 잔해들은 비록 그 형체는 확인할 길 없지만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더러워지고 어디까지 비속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나를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어 가는지 문득 문득 깨달을 때마다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속을 파고든다.

 

 

 오월이면 비가 오기를 바랐다. 촉촉한 봄비가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를 기원했다. 오월은 봄의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목이 타는 계절, 팍팍한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줄 할머니 손길 같은 봄비가 필요했다. 비의 냄새, 비의 촉감, 비를 그리워하는 간절함이 여자의 맨 살결을 쓰다듬을 때처럼 솟구쳐 오른다. 생명수 한 모금보다 더 짙은 애증의 굵은 마디들을 오월에 내리는 비는 툭툭 건드리고 지나간다. 단비보다 지독한 욕망, 비릿한 빗물에 섞여 내려가는 성긴 머리카락들. 그 속에 내가 보인다. 나의 얼굴을 한 타인의 모습이 어린다. 그러하기에 오월의 비는 쓰리다. 핏물 같은, 비가 뼛속까지 깊숙하게 파고든다.

 

 거리에서 그녀를 보았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니, 집을 나간 그의 동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언제 돌아올 지 기약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기다릴 거라 했다. 그가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릴 거라 했다. 나는 그 소녀가 무서웠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그녀가 무서웠다. 이제 그만 잊어야지.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 잊을 수 없는 건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기억은 그러므로 가장 최후에 남은 죽은 자를 불러오는 의식이다. 죽은 자를 불러 산 자를 각성시키는 방식이다. 살아있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절차이다.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의 노랫말은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 죄지을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1986년 5월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당시 대학생이었던 박혜정이라는 국문과 학생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존재와 무]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 자기를 알고 생각하는 존재를 일러 ‘대자적 존재’라 명명했다. 그러니까 대자 존재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자신의 모습에 얽매이거나 안주함 없이 매번 탈주를 꿈꾼다. 사르트르를 프랑스의 행동하는 지성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한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그가 강조한 ‘실존’은 그러니까 대자 존재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대자적 존재에 비해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그리하여 자의식이 없는 존재를 가리켜 그는 ‘즉자적 존재’로 명명하고 인간은 누구나 즉자적 존재에서 대자적 존재로 이행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음을 강조했다.

 

 신으로 유추되는 그 어떤 존재자의 얼개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근원적으로 자신의 삶을 철저할 만큼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무위에 올려놓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실존’으로 명명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박혜정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투사가 되어 앞에 나서서 맹렬하게 싸울 용기도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채 수수방관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한창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활짝 꽃피워 나가야할 이십대 초반의 한 젊은이를 병들게 했을 것이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벅찬 짐. 그는 격렬한 구호와 함께 하는 분신 대신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 서서히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홀로 삼키며 투신을 선택했다. 그가 모든 이들의 한숨을 뒤로 한 채 외롭게 걸어간 길을 그 누가 비겁하고 소심한 행동이라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그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말을 바꾸며 그 옛날에 품었던 유토피아에 대한 신념을 한 장의 휴지조각처럼 폐기처분 해버린 이 시대의 그 화려한 변절자들보다는 훨씬 더 양심적인 학생,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나는 오월이면 늘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한없이 괴로워했을 그녀를 생각한다. 죽음의 한순간 그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온갖 상념들을 생각한다. 그러하니 첼로의 무거운 저음으로 시작되는 서주(序奏)가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하는 이 곡에 얽힌 사연들을 구태여 말할 필요가 있을까.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는 한 친구는 어느 날인가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이 노래 얘기를 꺼냈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 합석했던 박혜정의 친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친언니는 동생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하도록 만류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상처가 깊었던 탓일까.

 

 산다는 건 죽음을 응시하는 한 순간이라서 모든 인간에겐 반드시 죽음이 찾아들기 마련이며 하여 생명이란 주어진 순간부터 되돌려줘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처는 떠난 사람이나 남아있는 이에게나 똑같이 가혹한 것이리라.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 견딜 수 없거나 그저 잠든 것처럼 살아있음을 후회하면서 세월을 낭비해버릴 뿐이기에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을 끊임없이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혹은 산다는 것 자체를 느낌이 없는 일로 치부한다 해도 오래 오래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는, 그 과거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눈앞을 어른거리는 역사의 흔적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치유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오히려 생채기 난 부위가 점점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환자들에게 그 누가 쉽게 희망의 쾌유를 기원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자신 없다. 단지 그 아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이 조금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뿐. 그리고 당신과 나는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같이 가는 것이라는 따뜻한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을 건네줄 수 있을 뿐.    

                

(187매)



(대중음악 정론지 <가슴> 2002년 5월호)

                       

명협도인 2010.05.09. 9:49 am 

큰 맘 묵고 쓰는 글 같은디, 천천히 공들여 읽고 있다오오. 회이팅! 눈이 아프니 활자나 좀 크게 올려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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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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