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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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들어가는 말)
보물섬  

아, 벌써 10년 전 '서브'와 '가슴'이라는 두 음악잡지에 연재했던 산문들인데 제가 게으른 탓에 아직 책으로 묶지를 못했던 글이에요. 몇 차례 출간제의가 있었는데 글에 대한 소심하고도 극심한 결벽증(?) 때문에 끝내 못 내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글을 쓰고 나면 왜 이렇게 자꾸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올려도 괜찮다고 하신 차 선생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십년 전의 일기를 다시 꺼내보듯 한 편 한 편씩 연재해보겠습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고 모자란 글이지만 어여삐 여기시고 재밌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엔 서문과 9월분을 같이 올릴게요. 

  

 

  *머리말*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던 것도 언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노래가 있었을 뿐이다. 노래는 시와 춤과 그를 사랑하는 청명한 대기와 살을 섞고 하늘 위로 올라 올라가 만인이 거처하는 거대한 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그 집에 사랑과 슬픔, 고통과 희망, 상처와 설렘 같은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곧 한 식구가 되었다. 그들의 집에서는 매일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들판이 되고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다. 베 짜는 할미가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직녀성, 세계의 지붕 파미르고원 근처에 세워졌다는 인류 최초의 도시, 그 신화 속의 신비로운 이름은 마고성이다.        

 

  옛날 옛적에 노래가 있었다. 술에 취해 물에 뛰어드는 미친 남편을 붙잡기 위한 백수광부의 처의 처연한 노래가 있었고 이를 본 뱃사공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자신이 목격한 광경을 그대로 들려주었을 때 그의 아내 여옥이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타며 지어 불렀다는 애절한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이웃집 여자의 입을 타고 온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갔다고도 한다. 사랑하는 왕비를 찾으러 갔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종달새 한 쌍이 정답게 노니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자신의 외로운 심사를 토로한 유리왕의 황조가, 행상 나간 남편의 밤길을 걱정하는 아내의 간절한 기원이 담긴 정읍사, 죽은 누이를 기리며 동기간의 못다 이룬 사랑의 정을 의탁한 월명사의 제망매가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통일 신라의 옛 서울 서라벌에선 여염집에서 흘러나오는 맑고 향기로운 노래가 사시사철 담장을 타고 흘러나와 지나가는 과객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명의 노래가 있는가 하면 또한 가슴속 저 깊숙한 곳에 묻어둔 치욕의 노래도 있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며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힘이 약한 왕국의 수치로 대신하여 읊었던 소현세자의 한없이 서글픈 노래와 영월로 귀양 간 상전 단종을 어명에 의해 죽이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시냇가에 앉아 자신이 지은 죄의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한탄하며 부른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노래는 수치스러운 역사 앞에 알몸을 드러낸 인간 실존의 극한점, 그 왜소함과 망연자실함에서 오는 갈등과 번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이라는 새 나라를 연 이후 이 땅 위에는 수많은 노래가 각기 다른 유구하고 유서 깊은 이름으로 불려졌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의 손에 의해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무수한 구전가요와 민요들, 향가나 고려가요, 시조와 가사와 가곡 그리고 판소리 사설의 유장한 가락들.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노래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태어나서 자라고 활동하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대중음악'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 문패를 달았다. 그리하여 그 문패는 이제 뭇사람들의 환호와 갈채, 무관심과 냉대라는 두 가지 녹을 동시에 주식으로 삼는 행복하고도 불행한 지금, 여기, 이곳의 노래에 관하여 말을 걸기 시작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노래에는 그 시대의 삶이 담겨있다. 한 시대의 역사는 바로 노래의 역사이다. 노래의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그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부여잡고 일으켜 세우는 인간의 역사이다. 그 역사는 한 인간의 삶의 여로와 같이 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노여울 때나 사랑할 때나 미워할 때나 그 길엔 언제나 늘 노래가 있어 삶의 깊은 시름과 애환을 대신하고 위무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의 순기능이다. 무릇 한 시대의 지성사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사상사가 녹아있듯이 노래의 사회사에도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 개인의 정신사가 스며있는 법이다. 이 글은 그러한 의미에서 그 수많은 노래 중에 어떤 한 개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몇 특정한 노래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이자 이 땅 위에 대중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숨을 쉬는 한 예술장르에 대한 지극히 사소한 ‘나’ 라는 사람이 자유롭게 써 내려간 애정의 기록이다.

 

  나는 이제 그 두 얼굴을 가진 노래를 악기 삼아 하나의 연주를 하려고 한다. 그 연주는 글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연주다. 그 연주는 내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내맡겨두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연주이다. 가는 데까지 가보라고 오히려 간살맞은 수작을 부리는 지극히 주관적인 연주이다. 타인의 눈으로만 본다면 도저히 객관적일 수 없는, 아니,객관적이면 안 되는, 그러면 정말 큰일이 나는, 지독히 편협하고도 이기적인 연주이다. 그 연주는 노래라는 악기를 축으로 시와 그림과 사진과 판화 그리고 춤이 한데 어울려 합주를 하는 그런 이상한 나라의 연주이다. 그 황홀한 연주에 주인은 따로 없다. 함께 뛰어들어 판을 돌리는 객들이 다 같은 주인이다. 목을 축이려고 이 판에 잠깐 얼굴을 내민 나그네가 주인이다. 나그네가 사랑하는 그들의 벗들이 주인이다.

 

  비록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무한히 자유로운 변주를 허용하는 생생한 연주지만 그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는 오래오래 내 마음속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화인처럼 살아 있었다. 잘 아물지 않는 상처를 다독거리듯 그렇게 어떤 그리움처럼 품어왔던 노래였다. 그 노래엔 개인적인 아픔이 숨죽이고 있으며 이제껏 그 누구에게나 한번도 말하지 못한 나만의 사연이 녹아있다. 그 노래를 품으며 나는 또 오래오래 앓았다. 노래가 주는 위안만큼 나는 그 노래에 빠져들었고 그를 사랑하였다. 그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무분별한 사랑이었다. 분별없이 미쳐버린 정신 나간 사랑이었다. 바보, 천지 같은 사랑이었다. 무엇보다 그 사랑은 어떠한 보상도 허락되지 않은 나 혼자만 좋아서 하는 외사랑이었다. 한 번 보거나 듣고 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두 눈과 귀가 멀어버리는 사랑 중의 사랑, 사랑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오래 전 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 그러나 어떤 날이면 희미해졌다가 또 어떤 날이면 점차 선명하게 되살아나서 영영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그림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그림은 한 인간의 생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밑그림일지도 모른다. 그 보이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혀 꼼짝없이 포로가 된 한 가엾은 인간이 여기 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자의 구차한 변명을 거울삼아 저 깊고 아득한 심연의 우물로부터 이제 그는 또 한 장의 삽화를 길어 올리려고 한다. 이 글은 그러한 노래와 기억의 충돌이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속으로 들어가 웃고 울고 싸우고 그러다가 다시 화해하는 감정의 삼투작용에 다름 아니다.

 

  그 낡고 다 허물어진 참으로 누추하기만 한 내 기억의 오래된 이층 다락방에 황송스럽게도 두 발을 들여 주신 아름다운 손님들의 귀한 이름들을 이제 밝히려고 한다. 나는 그들이 나의 보금자리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들을 접대할 생각이다. 한 계절이 가고 그 다음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유리창 옆 꽃병에 싱싱한 꽃을 꽂고 그 꽃들 하나하나를 다시 내 마음속에 새로 심을 것이다. 내 마음속에 새로 심어진 꽃들은 그 어느 날엔가 다시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되리라. 시들은 꽃들은 다시 피어나리라. 나의 입 속에서 수 천 수만의 만다라들로 환생한 그들의 입김들이 환한 눈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리라. 그들, 내 느낌과 영감의 원천인 오롯한 명함들, 그 숨 막히도록 황홀한 순례의 여정을 소개한다.  

 

 

(친구와 연인) 1월: 정혜선의 <나의 하늘>

 

(순수와 영원) 2월: 조동진[장필순]의 <제비꽃>

 

(생명과 소외) 3월: 채희준의 <춤추는 인형> & <난장이의 봄>

 

(문명과 자연) 4월: 송창식의 <잊읍시다>

 

(상처와 희망) 5월: 안치환[김광석]의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부칠 수 없는 편지>

 

(자유와 초극) 6월: 한대수의 <바람과 나>

 

(향수와 유년) 7월: 이연실[박인희]의 <찔레꽃> & <모닥불>

 

(자연과 여성) 8월: 이상은의 <초승달>

 

(사랑과 인생) 9월: 박은옥의 <바람>

 

(삶과 죽음) 10월: 한영애의 <비애>


(나와 타자) 11월: 김현식의 <한국 사람>


(끝과 시작) 12월: 김정호의 <님>


                       

김태형 2009.09.28. 10:41 pm 

시간을 견뎌낸 묵은 글이 좋은 글이죠. 연재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차창룡 2009.09.28. 11:57 pm 

예 시작하셨군요. 아직 책으로 묶인 것이 아니니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금빛나 2009.10.03. 7:26 pm 

최창근님, 반가워요~ 오랜만에 뵈어요. 열심히 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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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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