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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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08월) . . . 이상은, 영성(靈聲)이라는 이름의 한 매혹
보물섬  

몸도 마음도 안 아픈 사랑의 나라, 그곳으로 가는 머나먼 길

  - 이상은, 영성(靈聲)이라는 이름의 한 매혹

 


  팔월이다. 밤이다. 팔월의 밤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여름의 짧은 밤이다. 그 밤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밤의 대기는 맑고 청명하며 아름답고 신성하다. 곤한 잠에 빠진 아가의 곱고 여린 숨결처럼 밤은 따뜻하게 숨을 쉰다. 밤은 이 지구상에 눈을 뜨고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생하게 깨어있다. 밤은 말한다. 낮이 이루어 놓지 못한 버림받은 꿈들에 대해서 말한다. 유폐된 추억에 대해서 말한다. 그 추억이 버무려놓은 씁쓸함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밤은 침묵한다.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으며 침묵한다. 밤의 숨죽인 침묵은 이제 외로운 자들의 몫이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홀로 남겨진 자에게 부여된 유일한 선물이다.

 

  한여름 밤은 그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친다. 어떤 준비도 할 수 없다. 손을 쓸 겨를조차 없다. 기습적이다. 그러나 그 밤은 물리적인 시간 개념으론 지극히 짧은 밤이지만 심정적인 거리가 부여하는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길고도 긴 밤이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밤이다. 괴롭고도 괴로운 밤이다. 지나친 괴로움이 온 몸을 마비시키는 밤이다. 정신의 신경이 올올이 풀려 난자당하는 밤이다. 무시무시한 밤이다. 무서운 밤이다. 지독한 밤이다. 그렇게 팔월의 깊고 검은 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무수한 밤의 시간들이 내게로 쳐들어왔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내 발 밑으로 무수하게 흩어졌다 다시 모이길 되풀이하는 밤의 결을 향해 나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내민다. 손을 내밀어 그들의 살과 영혼을 보듬어 안는다. 밤의 여신이 입술 사이로 천천히 스며든다.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흘러나온다. 맑지도 탁하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그 맑음과 탁함을 모두 갖고 있는 한 여자의 고즈넉한 음성. 환청일까. 사위의 벽이 서서히 일어선다. 나는 마술에 걸린 북유럽의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년처럼 턴테이블에 음반을 건다.

 

  잠시 후, 휑한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고요한 파도 소리가 밀려온다. 파도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곧 이어 파도의 흰 포말 사이로 애수에 젖은 하모니카의 가녀린 떨림이 전해진다. 하모니카의 청명한 화음이 거대한 파도를 삼킨다. 내 어리석은 환각과 환시를 비웃기라도 하듯 짙은 공명의 울림을 저음에 깐 이상은의 노래, <초승달>이 시나브로 시작되었다.  



  1. 내면의 울림을 좇는 한 젊은 예술가의 도정

  (블레이크 : 영원이란 시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


  미국의 비교종교학자 조셉 캠벨은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원초적 체험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삶의 총체성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삶의 준거, 삶 자체의 진정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신화를 모아 연구하고 그 속에 내재해있는 삶의 이면을 구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쳤다. 그에 의하면 신화란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저 깊고 깊은 영성을 흔들어 깨우는 마법의 소리이자 서로 갈등하는 우리 몸 각 기관의 에너지가 상징적인 이미지, 은유적인 이미지로 현현(顯現)한 것이다. 그래서 그 신화의 모티프엔 한 인간의 영혼을 심연의 바닥에서 빛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구원의 음성이 깃들여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신화가 간직하고 있는 신비한 비밀의 세계를 꿈과의 비교를 통해 풀어보려고도 하였다. 꿈이 우리의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어떤 한 개인의 심층에 깔린 어두운 체험이라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샤먼이나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다시 창조된다. 다시 창조된 신화는 신들의 거처인 신전과 왕과 황제들이 살던 궁전에서 내려와 대중들이 모여드는 저자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그러한 신화의 끝에 문명이 들어서게 된다.

 

  저 아득한 옛날 옛적, 존재의 부피를 쉽게 가늠하기 힘든 시원(始原)으로서의 이야기,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미로의 숲에서 그 신화를 만들어간 이들은 바로 신이었다. 고대와 중세엔 신들의 이름을 영웅과 기사들이 대신했고 그러한 대물림의 유전적 피는 근대라는 시간의 자장 속으로 흘러들어 천재라는 소수의 엘리트, 극단적인 개성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다수의 영악한 대중들을 위해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은 연예인과 스포츠 인들로 대변되는 스타들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조셉 캠벨이라는 신화학자의 삶도 아니고 한 스타에 대한 라이프 스토리도 아니다. 권력 지향적인 자본의 기만적인 속성에 찌든 이 땅 위의 천박하고 기형적인 문화산업의 행태, 그 야비한 풍토에 관한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신문 가판대의 화려한 지면에서나 횡행하는 저 허무하고 입에 발린 죽은 말들의 잔치에서 벗어나 이제 막 자기 길을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딘 한 가수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그는 한때 말 많고 탈 많던 소문의 진원지, 그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중심무대 한복판에서 저 홀로 터벅터벅 걸어 내려와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보다 더 깊고 크고 자연스러운 울림, 근원적이며 감성적이고 개성적이며 자족적인 소리의 본질, 다이몬(Dimon)의 세계로 되돌아온 희귀한 아티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적이고 의존적인 도회의 삶에서 진정한 고향의 삶 속으로 귀향하고 있는 중이며 그러한 고단하고 힘겨운 싸움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과거 완성형의 그래서 그에게 기대할 것도 희망할 것도 전혀 남아있지 않은 이미 사그라든 음악인이 아니라 그의 몸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똬리를 튼 뱀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미래완성형의 음악인에 더 가깝다. 

 

  헤겔의 무한의 법칙에 따르면 그는 유한 바깥에 있는 무한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는 악무한의 어떤 꼭짓점을 향하여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 안에 있는 무한, 자기로 돌아오는 참무한의 한 지점으로 쉼 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곳이 어딘지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지점을 바라보면서 그가 그곳으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의 노래의 한 가사에서처럼 ‘부드런 그대 품에 가만히 안기어 끝없는 구름의 바다를 날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영원히>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2. 노래하는 음악인에서 노래하는 시인으로의 변신       

  (하우프트만 : 한 편의 잘 쓰여진 시는 우주의 영혼을 울리는 노래와 같다)


  이상은의 <초승달>은 그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개인적인 느낌으론 한 사람의 음악인이 단순한 음악인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거듭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첫 번째 증거이자 표상이었으며 그 출발선상에 놓여있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접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지금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는 한 친구네 집에 갔다가 오디오 근처를 굴러다니고 있던 하얀색 테이프 하나를 발견하게 됐었다.

 

  무심하게 주워든 그 테이프는 케이스도 없고 당연히 수록된 곡에 관한 부클릿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는 상태였다. 단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테이프의 앞면과 뒷면이 온통 하얀색이었다는 것 뿐. 그것이 이상은이 [더딘 하루]라는 타이틀 제목으로 발표한 3집 앨범이었고 거기에 <초승달>이 마지막 곡으로 실려 있었다. 그 때는 벌써 그의 5집 앨범 [언젠가는]이 시중에 발표되어 꽤 많은 사랑을 받고 난 한참 뒤였다. 그러니까 나는 거꾸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상은의 5집 앨범은 개인적으로도 내가 무척 좋아하던 음반이었다. 타이틀곡인 <언젠가는> 뿐만 아니라 곡들 하나하나가 서정적이었고 특히 뒷면에 들어있던 <길>은 같이 연합 방송활동을 했던 또 다른 한 친구로 인해 더 좋아지게 된 노래였다.

 

  어떤 노래가 좋아지게 되는 배경엔 처음부터 그 곡이 맘에 들어서기도 하지만 이렇게 가깝게 지냈던 사람과의 특별한 추억을 통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과는 달리 <초승달>은 처음 듣는 순간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곡이 풍기는 섬세하고 여린 정서가 나라는 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감성의 안테나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리라. 테이프는 음반과는 달라서 전체를 다 들어보기 전엔 그 중의 한 곡이 어떤 곡인지 알아내기란 무척 어렵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만 앞으로 돌려서 계속 듣기도 힘들다.

 

  나는 <초승달>을 듣기 위해서 [더딘 하루]에 실려 있는 곡 전체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상은의 5집 앨범의 모태가 실은 바로 이 3집 앨범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상은이라는 가수를 다시 보게 된 것도 바로 [더딘 하루]라는 앨범을 새로 접하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그리고 이 앨범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대로 사장돼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왜 이렇게 좋은 노래가 그냥 묻혀버렸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그만큼 안타깝고 아쉬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좋은 노래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리란 게 내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믿음이었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신념과 진정성이 깃든 그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그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록 다수의 대중들에겐 사랑받지 못한 앨범이었지만 내 주위에도 나처럼 이 앨범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뒤늦어서야 그것도 역시 우연한 기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매스컴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이상은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곳은 대학로에 새로 생긴 음악 카페 [살]에서였다. 그 때가 아마 홍대 입구에 우후죽순처럼 지하클럽이 들어서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된 생활공간의 지리적 반경을 감안해 볼 때 홍대는 멀었고 대학로는 가까웠다. 그 당시 나는 많이 지쳐있었고 문화적 호기심에 대한 열정은 식어있었고 그러한 허무함은 내 삶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다른 곳을 기웃거리게 할만한 충동을 억제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내 행동반경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나는 웬만해서는 대학로라는 일정한 공간을 벗어나지 않았다. 인사동이나 청담동에도 특별한 경우 외엔 나가지 않았고 신촌이나 종로 그리고 청계천 쪽의 책방에도 잘 들르지 않았다. 내 빗나간 삶의 한 국면에도 어쨌든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어쨌든 나는 카페 [살]의 구석진 먼발치에서 이상은의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이상은은 그곳에서 자신이 지금껏 거쳐 왔던 고민의 과정을 가감 없이 내비쳤고 나는 그곳에서 그가 하는 고민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새>를 포함한 몇 곡의 노래를 불렀다. 6집을 발표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을 것이다. 노래가 다 끝나고 마지막으로 앙코르 곡을 받는 순서가 돌아왔다. 나는 <초승달>을 듣고 싶었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발표된 신곡에 쏠려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결국 그의 육성이 전해주는 <초승달>의 아슴아슴한 정서를 맛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정서는 내 가슴에 오래오래 묻어둔 그래서 나만이 감지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나의 서정이었다.                             

 

  [살]에서 그를 본 몇 달 후, 그는 밤 시간대의 어느 토크 프로에 초대 손님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몇 달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가오는 영상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속에서 ‘아, 이 여자가 이젠 가수가 아니라 시인이 다 됐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내 가슴에 밀려와 붙박였다. 그의 눈은 아직 다 풀어놓지 못한 재능과 열정의 설렘으로 인해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그의 몸은 그 황홀한 설렘을 혼신을 다해 그의 주변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적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와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열망을 담은 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자 그를 예비하는 어떤 신비스러운 전조였다. 나는 아직도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그 미묘한 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말로서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는 미혹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3. 여성성, 그 신비로운 자연의 법칙

  (셰익스피어 :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다)


  5집 앨범인 [언젠가는]에 수록된 곡들과 마찬가지로 <초승달>이 수록된 그의 3집 앨범 [더딘 하루]에서도 그는 자신이 소유한 영감의 많은 부분을 자연에 빚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담다디>나 <사랑할거야>를 부르던 예전의 이상은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그리고 이 앨범에서 그는 작사, 작곡, 편곡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프로듀서가 되어 직접 음반을 제작하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데뷔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그녀 자신의 내면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은 그저 대중들에게 웃음이나 인기를 팔면서 살아가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분명한 자기 세계와 그에 맞는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음악인이라는 자기 인식에 다름 아니다.

 

  작가란 누구인가.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소유하고 있는 자다. 그러한 자각 아래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찾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수란 무엇인가. 스스로 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음악인을 말한다. 아마도 이상은은 3집 앨범을 준비하는 전후로 자기 정체성에 관한 확인을 수없이 되풀이하며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자애로운 대자연의 실체이다. 어쩌면 3집 발표 이후 이상은이 걸어간 길은 여성성의 풍요로움이 넘치는 대자연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자아, 대지모(大地母)로서의 여성을 새롭게 발견했을 것이다.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도 이러한 자기 변신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천주교는 마리아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달의 모태 신앙에 대한 희원과 바람을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저명한 종교사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에 의하면 달은 인류의 보편적인 상징 전통 안에서 여성성의 현현과 그 신비를 가리키는 대표적 기호이다. 달과 시간, 달과 운명, 달과 죽음, 달과 재생, 달과 통과제의는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급기야 우주 생물학과 신비 생리학으로까지 확장되는 달의 외연은 한마디로 여성성의 범주에 해당하는 사물의 총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달은 순수한 처녀를 낳는다. 처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니라 신 또는 우주와 같은 생명의 주기를 호흡하는 거대한 여자를 말한다. 존재는 여성의 몸을 통해 거듭난다. 여성의 육체 안에서 부활의 신앙은 끊임없이 회귀하고 또 순환하는 것이다.      

 

  밤이다. 방안에 한 여자가 앓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여자의 유일한 낙은 창을 통해 비치는 하늘을 내다보는 것이다. 그 하늘엔 초승달이 걸려있다. 초승달을 보고 있으니 문득 떠나간 그 사람이 생각난다. 내 곁을 떠난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초승달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에 투영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눈물난다. 나는 내가 흘린 그 눈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건다. 목걸이는 떠나간 그와 남아있는 나를 연결시키는 끈이지만 그가 없으니 나는 나를 스스로 속박하고 감금할 도리밖엔 없다. 내가 나를 가두고 있는 밀폐된 감옥으로 파도가 밀려온다. 파도는 상처로 얼룩진 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은 가벼운 떨림에서 시작하여 점점 더 크고 무거운 울림으로 변모한다. 나는 속절없이 굽이치는 리듬감에 몸을 내맡긴 채 정처도 알 수 없는 그 어디론가 흘러간다.

 

  어디선가 홀연히 머언 곳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파도는 그리움이고 미련이다. 그 물결 너머 아득한 곳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밤바다를 건너간다. 죽음의 심연을 건너 그대에게 가 닿고자 한다. 그대가 보고 싶다. 그대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나인가, 너인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가.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너인가. 그대가 그 누구이든 나는 그대를 만나고 싶다. 그대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그대에게 말을 걸고 싶고 그대의 품에 안기고 싶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몸은 지상에 유배된 채 매여 있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프다. 아니, 마음이 아프니 몸이 아픈 것인가. 몸이 가지 못한다면 마음만이라도 가야한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그대의 나라로 아픔도 고통도 훨훨 벗어버리고 날아가야 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기다린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바뀔 때까지 손꼽아가며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기약이 없기에 그 기다림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다. 미래가 없는 기다림, 전망이 없는 기다림, 실현 가능성이 없는 기다림, 그래서 그 기다림은 자폐적인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다하면 이제 나는 가는 것이다. 가면 아주 가는 것이다.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4. 초승달


  초승달 노오란 눈물 흘리면 그 눈물 따다 곱게

  목걸이 만들어 걸고 그대의 나라로 가리

  기다린다고 기다린다고 하얀 어깨 들썩이던 그대를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말해주며 그대 품에 안기리

  언젠가는


  4. 1. 초승달, 자폐적 사랑의 한 범주    


  . . .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 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 . . 여수가, 여수가 울고 있는 것 같아요

  . . . 여수로 가면, 나한테도 음악 같은 건 필요 없어요

  - 한강, <여수의 사랑> 중에서 -


  한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바라보는 또 한 여자가 있다. ‘정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와 ‘자흔’으로 불리는 여자. 한 여자는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은 순간 그 사랑을 버린다.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을 불신한다. 또 한 여자는 사랑에 굶주렸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생의 전부다. 한 여자에게 사랑은 존재하지 않지만 또 한 여자에게 있어 사랑이란 절대적인 것. 두 여자는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 여자는 또 한 여자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연민으로 시작된 사랑이 증오로 뒤바뀐다. 미움을 받는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한다.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고 고립시킨다. 부대끼고 시달린다. 끝끝내 자멸한다.

 

  그의 사랑은 처음부터 자폐적이었다. 그의 사랑은 가까운 것을 거부하고 먼 곳을 갈망하는 원초적인 사랑이다. 그러하기에 한 여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의 시선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증오하면서도 끝끝내 물리칠 수 없는 지긋지긋한 사랑. 뒤틀린 매듭을 풀 길 없는 처음부터 엇나간 잘못된 사랑. 한 쪽이 허물어지면 다른 쪽도 맥없이 주저앉고 마는 어둡고 운명적인 사랑. 그런 사랑일수록 전염성은 강해서 상대방을 헤어 나오기 힘든 늪의 심연 속으로 끌어당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지극히 위험하다.

 

  한 여자는 또 한 여자에게서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한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상처를 기억해낸다. 그 상처는 특별한 처방이 따로 없고 약도 잘 듣지 않는 아주 오랫동안 아픔이 지속되는 마음의 상처, 영혼의 상처다. 제대로 아물지 않고 설령 아물었다 해도 생채기 난 자리엔 반드시 자취와 흔적이 남는다. 지워지지 않는 그 자취와 흔적을 없애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 상처는 원체험이 상기시키는 알 수 없는 슬픔에 빚진 정신적 외상에 가깝다. 트라우마(Trauma)가 던지는 파문이란 그토록 불길하고 치명적이고 지독하여서 한 여자는 또 한 여자의 망가진 꿈과 그 실체를 직시할 수가 없다. 직시하기는커녕 외면하고만 싶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네가 아니라면 너는 또 누구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라붙는 생의 비의를 감당하기가 벅차다. 고통스럽다. 거울 속의 거울은 그렇게 금이 간 채 산산이 부서진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다. 한강의 <여수의 사랑>은 이상은의 <초승달>이 내포한 동성애적 자폐성, 그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을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하고 있다


  4. 2. 초승달, 환하고 둥근 아니마의 세계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남해 금산> 전문 -


  이상은의 <초승달>이 깊고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이성복의 <남해 금산>은 그보다 환한 한여름의 대낮을 그 전경으로 깔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금산의 저 높은 산정에서 가없이 탁 트인 눈앞의 남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적 영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싱싱한 연어 떼처럼 해와 달이 빚어내는 사랑의 근원, 그 본질적인 아우라에 접근해 들어갔으리라. 고고한 자유주의자 김 훈은 이 시를 ‘그 여자’를 중심축으로 놓고 거기다 ‘해와 달’을 끌어들여 잠재태와 가능태로써의 현상학적인 상징의 차원에서 그 의미를 유추하고 해석해내었지만 나는 그저 단순하게 그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오누이 남매에 얽힌 민담이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연오 세오의 설화에서 그 사랑의 아름다운 기원을 인용해보려 할 따름이다.

 

  옛날이야기에 의지한다면,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은 원래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묻혀 있는 것이다. 한 여자도 그렇게 돌 속에 묻혀 있었다. 돌은 나와 한 여자의 사이를 갈라놓는 방해물이자 그 돌 자체로만 보면 내구성과 견고성으로 단단하게 응집된 어떤 존재이다. 그 방해물을 넘어서서 내가 그에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 길은 시선의 깊이가 가 닿지 않는, 그러한 가시적 깊이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멀리 있다. 그와 나 사이에 길은 아예 나지 않았고 그래서 길은 없다. 그와 나 사이에 길을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것도 내가 그 여자를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품어주는 사랑이어야 한다. 길고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사랑이 가능하게 되면 그제서야 나도 돌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한 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결합이자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의 통합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루어진 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은 아직 미완의 사랑이다. 사랑의 완성은 그와 나의 이별을 통해서만 보다 큰 대승적 사랑으로 승화된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해와 달을 포함한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다 참여하는 포괄적 사랑이다. 사랑은 그렇게 떠나가는 것이다. 사랑은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한 사랑은 떠나가고 한 사랑은 뒤에 남겨졌다. 남겨진 사랑은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한다. 누군가를 그리는 사랑은 당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로운 사랑은 마침내 저 홀로 침잠한다. 이 세상 외로움이란 외로움은 다 움켜쥐고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간다. 외로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거침없이 내달린다.

 

  그 신성한 사랑에 하늘과 바다도 동참한다. 하늘과 바다는 큰사랑을 위해 작은사랑을 접은 내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귀소처이다. 내가 물에 잠기는 행위는 형태가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로 회귀함을 뜻한다. 귀소처로 회귀하는 그 사랑은 남성적 사랑이 아니라 여성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원초적 모성에 가까운 우주적 잠재력의 집합이다. 그것은 또 칼 융이 말한 남성의 마음속에 깃들여있는 여성적 요소, 여성의 원형이자 영혼의 표상이고 시의 친구인 영원한 아니마(anima)의 세계이다.

 

  김소월에서 비롯된 우리 근, 현대 시사의 이러한 전통은 백 석과 서정주를 거쳐 이성복에 이르렀고 그들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여러 시인들이 가고 있는 길이다. 그 길의 한 축은 강은교와 허수경, 천양희와 나희덕, 최정례와 노혜경과 이향지 같은 여성 시인들에 의해 섬세하게 벼려지고 있으며 나머지 한 축은 김승희와 최승자와 김혜순, 김정란과 박서원, 김선우 같은 또 다른 여성 시인들에 의해 죽음과 재생의 역사적 주기를 반복하면서 다가오는 21세기의 희망에 찬 대희년을 영성의 시기로 예비하고 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이 세계를 이끈다.’는 괴테의 놀라운 직관처럼 새 천년은 여성적인 것, 부드러운 것이 남성적인 것, 강한 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을 것이다. 그것은 또 모성적 육체를 중시하여 초기의 반항과 거부, 부정과 혁명의 페미니즘에서 사랑의 철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더 눈을 돌리고 있는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기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상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에서 오는 새로운 모녀관계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던 뤼스 이리가라이의 이론과도 그 맥이 통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 무한광대한 힘의 원천을 한국의 옛 그림, 이를테면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김정희의 고고한 선비정신이 녹아있는 <세한도>와 같은 문인화와 최 북과 정 선의 진경산수 혹은 안중식과 허백련, 이상범과 변관식 그리고 노수현의 수묵화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또 그 힘은 무아의 경지에서 우러나오는 대자연의 율조에 바탕을 둔 한국 춤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한국 춤은 상고 시대의 무격 사상과 민간 신앙 속에 유불선의 사상을 가미한 동양의 종교와 철학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발탈 보유자였던 하보경 옹의 ‘추는 듯 아니 추는 춤’처럼 춤이 동작과 육체에만 매여 있지 않고 더 높은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의 자연주의는 꾸밈이 있으되 그와 같은 꾸밈이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선으로 돌출되지 않고 오히려 유연하고 유장하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율동을 낳았다.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 그 기교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내는 무늬의 아름다움은 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적인 미에 더 가깝다. 마치 하늘 높이 날고 있는 학이나 백조의 침묵에 가까운 날갯짓과도 같이.

 

  언젠가 한여름 밤 국립극장의 야외무대에서 본 전설적인 중국 경극배우이자 무용가인 매란방을 닮은 이매방의 [승무]는 그 세계의 정신적 표상이었다. 장삼의 그 너른 품과 소매가 보여주는 존재의 높은 상태, 하늘의 세계에 닿으려는 인간의 무한한 상승의지는 세속의 관념을 초월하여 신성한 경지로 접어드는 삶과 예술의 한 구경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지상적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 천상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궁극적 힘이고 집념이며 그를 통해 신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몸짓의 소산이자 하늘과 땅, 나와 너의 결합으로 완결되는 질서화 된 우주 형태의 인식, 만물조응의 한 현상이다. 고뇌는 고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안고 앞날을 기원하며 자유와 영원을 희원한다. 자연과 인간, 세계와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세속의 번뇌를 초월한 이러한 삶의 세계는 조지훈의 <승무>와 이동주의 <강강술래>에서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한국인의 내성, 그 소리의 집합체이다.       

 

  아주 깊고 깊은 산사의 한여름 밤을 떠올려 보라. 그곳에는 교교한 달빛 아래 가사와 장삼을 걸치고 법고를 두드리며 한없이 느리게 춤을 추는 한 여인이 있다. 여인의 곁에는 아름다운 소년이 피리를 불고 있다. 달빛이 기울어갈수록 북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그에 따라 여인의 춤사위도 격해진다. 절정의 순간, 피리의 가느다란 음률은 서서히 잦아든다. 여섯 개의 구멍 사이로 영혼들의 입김이 피어오른다. 열두 명의 아기 피리가 어머니의 몸에서 기어 나온다. 그들의 숨소리가 새어나온다. 북과 피리의 합주가 시작되었다. 여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으로 바람의 기운을 받는다. 내 몸에는 갑자기 수많은 비늘이 돋아난다. 그 비늘은 하얀 날개를 달고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가끔씩 풍경소리만 오고 가는 그 산사의 고즈넉한 풍경 아래 나는 이상은의 노래를 들으며 오래오래 그토록 슬픈 꿈을 꿀 것이다.   



  5. 몸도 마음도 안 아픈 사랑의 나라

  (노발리스 :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이다)   


  자신을 알려면 영혼 속을 들여다 봐야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향연]의 철학자 플라톤은 아름다움은 지고의 선에 이르는 입구요, 참 진리를 밝히는 찬연한 빛임을 수많은 소년들과의 사랑을 통해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생생한 체험에서 유래된 플라토닉 러브란 단순한 동성애적 사랑이 아니라 원래는 변하지 않는 이상미, 인간의 영혼과 지혜에 대한 순애가 아니었을까. 이상은은 순수한 의미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는 신비주의자다. 그가 바라보는 이상향의 세계는 이 지구상에서 저 머나먼 우주의 어느 한 별에 이르는 거리처럼 까마득하다. 그 세계는 멀리 있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라고 프랑스의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가스똥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꿈꿀 권리]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낙원은 지상과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간의 신비한 결합이 진행되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기운이 우주적 조화로 충만한 곳이다. 그 세계는 이 땅 위에 하늘이 처음 열리던 태초의 그 바닷가처럼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곳에선 햇빛은 밝고 바람은 맑으며 온갖 꽃과 풀과 나무가 자라고 해질 무렵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향기가 바다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하늘 위의 붉은 노을과 검은 구름 한가운데로 번져갔으리라. 세상 밖의 아득한 풍경처럼 시간의 너울을 타고 물결은 갈매기의 노래 소리에 맞춰 하염없이 밀려왔다 밀려갔으리라.

 

  그 세계는 그리스인들이 꿈꾸던 영원한 미의 제국 아르카디아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기도 하다. 황금 신전과 신비한 몰약으로 뒤덮인 저 광대한 아메리카의 엘도라도이고 토마스 모어가 자신의 책 속에 건설한 인공낙원 유토피아이며 제임스 힐튼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세계 샹그리라다. 시간의 흐름도 까맣게 잊은 채 복숭아꽃 향기에 취해 너나없이 평화롭고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드는 동양의 무릉도원이자 홍길동이 바다를 건너가 세운 지상의 천국 율도국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망각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아틀란스 대륙이거나 마야나 잉카, 아즈텍 제국 혹은 여인들만 모여 산다는 아마조네스 왕국 그리고 옛 전설 속의 파랑섬 이어도이다. 그러나 이상은은 그 어느 곳으로도 가려 하지 않는다.

 

  [Asian Prescription, 아시아의 처방](1999, EMI)이란 이름의 앨범을 선보이면서 그 동안 발표했던 곡들을 모아 음악인생의 중간 결산을 막 끝낸 그는 이제 대자연의 깊고 넓은 품을 떠나 어디로 비상할 것인가. 혹은 그가 머물던 낙원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천상의 세계에서 내려와 다시 지상의 더럽고 냄새나는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되돌아올 것인가. 험난하고 고달픈 현실에 굳건하게 발을 내딛고 그와 몸을 섞을 것인가. 그 어느 쪽이든 그가 세우고자 하는 그만의 영토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아니, 세상 밖으로 나가도 찾을 수 없다. 7집 앨범 [외롭고 웃긴 가게]에 실려 있는 마지막 곡 <어기여디어라>의 가사 ‘하늘의 별도 땅의 꽃도 가만히 제 길을 살아가도 서로 다른 몸으로 나서 다른 꿈을 꿀지라도 해는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지고 물길은 하늘에 닿고 해는 뜨고 지고 달도 뜨고 지고 마음은 서로에 닿고“처럼 그가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나라는 정적과 적막 속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생의 궁극적인 본질과 진실에 관해서 차분히 관조할 수 있는 작지만 은밀한 세계다.

 

  그곳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인생과 외면하고픈 삶의 추한 이면이 모두 용서되는 세계이며 보잘것없이 누추한 나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처럼 둥글고 환한 빛의 세계다. 궁극적으로 그 세계는 작가 자신의 음악 속에 숨쉬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자 마음의 집이다. 시인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세계는 ‘귓속에 복숭아꽃 피고 노래가 마을이 되는 나라’이며 ‘어지러움이 맑은 물 되어 흐르고 그 흐르는 물 따라 불구의 팔다리도 함께 흘러가는 곳’이며 ‘죽은 사람도 다같이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잔 권하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이다. 그것은 시인 이성복이나 음악인 이상은이 꿈꾸는 세계이자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우리들 각자가 지향하고 만들어가야 할 그런 세계이다. 그 가깝고도 먼 곳으로 나와 너, 우리 모두는 가고 싶은 것이다.


(88매)





(대중음악 정론지 <서브> 199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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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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