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근의 "세계음악산책"

942
[예술을 위한 순례] 나의 노래와 음유시인들(나오는 말)
보물섬  

1

 

돌이켜 보면, 그건 '운명'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말이 없을 듯하다. 더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돌다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만나는 어떤 섬광 같은 느낌, 그걸 '우연' 또는 '필연'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훌쩍 뛰어넘은 자리에 숨어있는 '인연'의 옷깃이리라. 굳이,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설에 기대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건 사이엔 분명 보이지 않는 실타래처럼 엮인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이어져있는 것 같다.

 

 

2

 

  나는 그리워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도, 심지어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며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던 세계는 어이없게도 학교라는 곳에 들어오기 전 아무 것도 모른 채 동네 누나들이나 꼬마 친구들과 어울려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뛰어 놀던 때였다. 삶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던 백색의 계절들. 내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했던 시절을 꼽을 것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우울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지나치게 겉늙어갔던 것 같다. 양철북을 두드리며 육체적 성장이 멈추기를 기원했던 오스카의 일생처럼 이젠 멀리 떠나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그 그리움의 농도는 더 짙은 것일까. 영원히 회귀할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의지는 그것이 강인하면 할수록 더욱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비극적이면 비극적일수록 어긋나기만 하는 생의 부조리와 모순들. 나는 그 불가해한 삶의 여울 속에서 나를 지켜줄 작은 연꽃을 발견했다. 처음엔 한 송이였지만 나중엔 어마어마하게 드넓은 화엄의 바다에 지천(地天)으로 널린 한 세상으로 확장된 나의 어여쁜 꽃들. 그것은 다름 아닌 노래였다.


 

3


  어렸을 때부터 나는 노래가 좋았다.

  그것도 일제 시대의 <학도가>나 <희망가>, <사의 찬미>, <황성옛터> 같은 옛 노래부터 시작해서 남들이 얼마간 왜색이 묻어나는 가요라고 해서 평가절하 하는 트로트 이를테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고복수의 <타향살이>와 남일해의 <꿈에 본 내 고향>, 백난아의 <찔레꽃>과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현 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가요 무대]에서 불려졌던 <꿈꾸는 백마강>이나 <물새 우는 강 언덕>,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이별의 부산정거장>, <울고 넘는 박달재>, <선창>, <동백 아가씨>, <번지 없는 주막> 같은 내 나이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노래들이 이유도 없이 무작정 좋았다.

  스타일은 달랐지만 한명숙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나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 송민도의 <꽃 중의 꽃> 역시 가슴을 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가곡들

  

  예를 들면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지닌

  소프라노 남덕우나 박순복이 부르는 조병화 시-김성태 곡의 <추억>이나

  이은상 시-홍난파 곡의 <사랑>,

  김남조 시-김순애 곡의 <그대 있음에>,

  박목월 시-김성태 곡의 <이별의 노래>라든가

 

  테너 엄정행과 김진원 특유의 카리스마가 배어 나오던 김동명 시-김동진 곡의 <내 마음>과

  이은상 시-현제명 곡의 <그 집 앞>,

  이은상 시-김동진 곡의 <가고파>와

  김말봉 시-금수현 곡의 <그네>,

 

  구성지고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던 바리톤 오현명이나 김성길의 애창곡인 <명태>와 <떠나가는 배>, <사공의 노래>와 <봄처녀>, <비목>이나 <기다리는 마음>, <보리밭>이나 <성불사의 밤>

 

  그리고 메조소프라노 김학남과 백남옥의 고정 레퍼토리였던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이나 <저 구름 흘러가는 곳>, <그리움>과 <동심초>, <수선화>나 <사월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었다.

 

 <봉숭아>에서 <선구자>를 거쳐 <얼굴>과 <바우 고개>에 이르는 그 무엇이 나의 여린 정서를 건드렸던 걸까.

 

 <따오기>나 <겨울밤>,

 <섬집아기>,

 <등대지기>,

 <해당화>,

 <오빠생각>,

 <무지개>,

 <겨울나무>,

 <꽃밭에서>,

 <과꽃>,

 <과수원길>,

 <파란마음 하얀마음>,

 <고드름>,

 <작은 별>,

 <노을> 같은 동요에 일찍이 마음을 빼앗긴 것도 어쩌면 벌써부터 예정된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이 노래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내 속엔 나도 모르는 소년 하나가 몸의 성장주기와는 상관없이 꿈꾸는 어린 왕자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내게 행운일까 불행일까, 혹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4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살이처럼 이번 연재를 끝마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연재를 시작한 것이 1999년 8월이었고 끝을 맺은 때는 2002년 7월이니까 꼬박 삼 년이 걸린 셈이다. 삼 년이라는 시간은 그냥 흐르지는 않았는가 보다. 20세기가 저물고 새 천년의 문이 열렸을 뿐더러 내 개인적인 신상에도 변화가 생겼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잡지사 사정으로 두 번이나 연재가 중단 됐을 때는 마지막 마무리를 짓지 못할 줄 알았다. 그만큼 대중음악 장르는 여러 가지 면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랬기에 이렇게 무사히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 것이 우선 기쁠 따름이다.

 

  내 바람은 아주 소박하다. 변변찮은 이 글이 척박한 토양 속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이 땅 위의 음악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작은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덧붙여 이번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미지의 예술가들에게도 끝까지 용기를 내시라고 응원을 보내고 싶다. 지금도 내 눈이 빗겨간 그 어디선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아티스트들이 언젠가 빛을 볼 그날을 기다리며 겸손하게 작업 중이실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좀 더 많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내 좁은 시야와 기울어진 취향 때문이니 나보다 눈 밝은 다른 훌륭한 분들이 곧 그 소중한 작업에 대한 보상을 넉넉하게 해주시라 믿는다.



  연재에 한해서 말한다면 역시 아쉬움이 크다. 그 중에서도 산울림(김창완)이나 들국화(전인권), 어떤날 등의 그룹들을 전면에 내세워 한번 써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여력이 되질 않았다. 김영동이나 이병우, 한상원 같은 연주인들도 그와 같은 사유로 인해 빠졌기 때문에 그 안타까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정선, 강산에나 장사익, 김목경, 시인과 촌장들(하덕규)에게도 본의 아니게 빚을 지게 되었지만 다음 기회가 분명 있을 거라 스스로 자위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김민기나 양희은, 신중현, 조용필 같은 분들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수없이 다뤄졌기에 내 서툰 글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누가 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경우다. 험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분들이 외롭게 지켜온 음악 정신의 고귀한 가치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90년대에 빛나는 음악적 성취를 이룬 인디 계열의 그룹과 밴드들 가령 델리 스파이스나 언니네 이발관, 허클베리핀, 미선이, 은희의 노을, 유 앤 미 블루,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 황신혜 밴드, 크라잉 너트, 노 브레인 등은 내게도 환희 그 자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세대 전의 가수 박경애가 부른 <곡예사의 첫사랑>의 현대적 변주인 것처럼 다가왔던 크라잉 너트의 <서커스 매직 유랑단>과 <말달리자>나 노동운동의 불꽃을 점화시켰던 전노협 문화국의 <노동악법 철폐가>의 2000년대 새 버전인 듯한 노 브레인의 <청춘은 불꽃이어라>와 <바다 사나이>는 종착지를 상실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실존적인 고뇌를 그대로 발산하는 것 같아 이상한 공감과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곤 했었다.

 

  펑크 록 적인 성향이 짙은 이들 밴드의 폭발할 듯이 유쾌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도 늘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팠었고 급기야는 원인 모를 슬픔에 잠기게 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주얼이 강한 현란한 라이브 무대를 보여주는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의 공연처럼 그들의 음악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작정 한곳으로만 내달리는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를 떠올리게 한다.


 

5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마치 그 옛날 어린 시절, 진공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나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을 잠결에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당황스럽고 수습하기 힘들던 아련한 기억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흘러, 흘러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어느 무덥거나 추운 날 저녁이면 꽃 피고 낙엽 지는 거리에서 나는 여전히 낮고 조용한 어조로 채은옥의 <빗물>이나 윤정하의 <찬비>, 조덕배와 바다새도 부른 적이 있는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과 <잊혀지지 않아요>, 한경애의 <옛 시인의 노래>와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최양숙의 <눈이 내리는데>나 유익종의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와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진 박길라의 <나무와 새>를 흥얼거리게 되리라. 패티 김의 <이별>과 임희숙의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 박상규의 <조약돌>과 정훈희, 김태화 부부의 <안녕>, 노사연의 <만남>이나 <님 그림자>, 석미경의 <물안개>, 하남석의 <막차로 떠난 여인>과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과도 같았던 그 뜨거운 노래들.


  <기도>와

  <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에서>와

  <옛이야기>와

  <겨울바다>와

  <아득히 먼 곳>과

  <해후>와

  <당신은 울고 있네요>와

  <촛불 켜는 밤>과

  <바람이 전하는 말>과

  <빛과 그림자>와

  <회상>과

  <이름 없는 새>와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와

  <암연>과

  <나 어떡해>와

  <그대로 그렇게>와

  <그대에게>와

  <매일 매일 기다려>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비와 외로움>과

  <연극이 끝난 후에>와

  <여러분> 같은 끝이 없는 노래들.

 

  그 노래들이 내 생의 연인이자 내 삶의 동반자였기에.



                       

두루미 2010.09.15. 4:11 pm 

  잘 읽었습니다. 뜻깊은 작업을 해내셨네요...
강산에도 좋고...크라잉 넛도 참 좋지요...산울림도...
아니 위에 거론된 곡과 뮤지션들 다 들 너무 너무 좋은 곡이며 멋진 이들이지요..
음악을 하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이 느껴지는 진지한 글이었습니다. 수고 짝 짝 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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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근 - 극작가. 2001년 서울시무대지원사업 선정작 <봄날은 간다>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극으로 <서산에 해 지면 달 떠온단다> <12월 이야기> <13월의 길목>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인생이여, 고마워요』 가 있다. 제38회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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