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829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을 누리라
詩牧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을 누리라

 

 

매일같이 집 뒤로 난 산길을 오른다. 겨울 산길은 한적하다.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오르며 나는 구름을 벗 삼기도 하고, 푸른 허공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산새들을 벗 삼기도 한다. 물푸레나무 참나무 같은 활엽수 군락에 난 오솔길을 따라 산 중턱까지 오르면 소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헐떡헐떡 숨이 차올라 소나무 숲 아래 앉거나 벌렁 누우면, 사시사철 푸르른 솔빛이 하늘 가득 펼쳐져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늙지 않는 저 푸르른 솔빛, 늙지도 쇠하지도 않는 영원히 젊은 창조주 하나님을 닮았나보다. 내가 소나무 숲에 드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소나무 숲 아래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솔바람 솔향기가 온몸을 감싸고 돈다. 피조물을 일컬어 ‘하나님의 연인’이라고 한 수도자가 있지만, 나는 솔향기를 솔솔 내뿜어 내 존재를 감싸는 소나무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느끼곤 한다. 어찌 소나무뿐이랴. 맑은 새소리와 구름과 바위와 계류에 흐르는 물소리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생동하는 기운을 느낀다. 한적한 숲길에서 만나는 날짐승들의 발자국과 동글동글 싸놓은 배설물에서도 하나님의 자취를 느낀다. 산에 들면, 무릇 하나님의 형적(形迹) 아닌 것이 없다. 한가로움이 주는 값없는 선물이다.

 

중국의 시인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시 한 수가 문득 떠오른다.

 

저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고자 해도 금할 이 없고 쓰자 해도 다 할 날 없으니

이것이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다.

 

하지만 이 무진장한 바람과 달빛도 사람이 그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면 스며들 길이 없다. 숱한 물(物)에 대한 집착과 탐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저 공짜 바람 공짜 달이 주는 무량의 기쁨도 누릴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이런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잠기지 못할까. 너나없이 흔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딱하게도 사람들은 흔치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금화 같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이런 탐욕스런 마음으로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베풀어 주는 한가로움을 맛볼 수 없다. 청풍명월만큼 흔하고 흘러넘치는 게 없는데도 말이다.

 

때때로 우리가 이런 한가로움을 누릴 수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고갈되고 탈진하고 만다. 탈진한 사람이 어찌 사랑으로 타인을 보듬어 안을 수 있으며, 더욱이 그런 틈 없는 가슴에 하나님인들 끼어드실 수 있겠는가.

 

나는 켈트족 출신의 작가 존 오도나휴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한다. 아프리카를 탐험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 남자는 짐을 운반하는 서너 명의 아프리카 짐꾼들을 데리고 정글 속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3일 동안을 걸었다. 3일째 되는 날, 이 아프리카 짐꾼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면서, 정해진 날짜까지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마침내 그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이유를 말해보라고 다그쳤다. 한 짐꾼이 대꾸했다.

 

“우리는 이곳까지 너무 빨리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영혼이 살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가로움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중세의 수도자 마이스터 엑카르트도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안식’이라고 갈파했다. 사람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사람의 본성 역시 안식일 것이다. 내가 한적한 숲을 자주 찾아드는 것도 내 본성의 갈망을 따른 것이고, 사람들이 분주함을 피해 자기 영혼이 쉴 곳을 찾아드는 것도 자기 본성의 갈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이런 본성을 거역하고 경마장의 트랙을 도는 말처럼 질주하고 또 질주하는 삶을 산다면, 어찌 주인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수도자는 거듭해서 말한다.

 

“안식보다 더 값진 것이 없으니,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철야와 단식과 기도와 모든 형태의 고행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오직 안식만을 거들떠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요한 마음을 바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렇다. 우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양식만 먹고는 살 수 없다. 우리는 솔숲의 푸른빛도 먹어야 살며, 숲의 적막을 깨는 청량한 새소리도 들어야 살며, 일상의 타성과 고정관념을 깨는 시 읊는 맑은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살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시간과 달력의 횡포에서 벗어나 우리 영혼을 살찌울 숲의 한적, 바위의 침묵,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고요도 먹어야 살 수 있다.

 

사마리아 땅에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가 말한 그 비밀스런 양식이 혹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비밀스런 양식을 먹었기에 예수는 야생초 같은 푸른 영혼의 젊음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에 늙은 나무란 없듯이 영원히 젊은 창조주와 한통속으로 어울렸기에 그토록 풋풋한 젊음을 꽃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도 나는 한가롭게 산행을 즐기며 자연스레 이런 묵상에 잠겨들었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느리고 더딘 내 발자국에 포개지는 그분의 고요한 자취를!

                                              

 

 



(가이드포스트 2010. 1.)

                       

김태형 2010.02.18. 1:50 am 

숲의 한적, 바위의 침묵,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고요를... 새겨 읽겠습니다.

명협도인 2010.02.18. 8:41 am 

김시인, 산전수전 타이틀이 맘에 드네요. '전'자가 좀 무겁지만, 산에 기대고, 물에 기대어 그냥 한 번 가보려구요.

두루미 2010.03.16. 1:01 am 

여기와서 산의 경과 물의 경을 읽으며 고요해지렵니다.
선생님 글과 잘 어울리는 산전수전입니다.

차창룡 2010.02.19. 9:02 pm 

잘 읽었습니다. 구구절절 가슴으로 들어오는군요.

차창룡 2010.02.19. 9:02 pm 

새로 시작되는 연재물을 맨 위로 올리도록 하지요. 그래야 차곡차곡 쟁여지는 느낌이 날 것 같습니다.

천수호 2010.03.11. 10:41 pm 

저는 뭐하느라... 선생님의 산행을 이제야 따라 나서는 걸까요? 산의 고요로움에 취하며 따라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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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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