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519
황금방석
詩牧  

황금방석

 

 

노란 은행잎들이 제 몸을 떠나는

결별의 의식을 행하는 동안,

먼저 떨어진 황금알을 주워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지.

찬바람이 은행잎들을 천지사방 날려

한 그루 고독의 수역(樹域)을 넓히는 동안

숲속 사원에서 울려오는 독경소리는

나뭇가지를 흔들며 노란 법어(法語)들을 흩날렸지.

황금알 줍는 재미에 홈빡 빠져

끼니때도 잊어버리고

법어 따위도 귓등으로 들으며 비닐봉지를 채우다가

말랑말랑한 황금알을 잘못 밟아

주욱 미끄러지며 쿵, 엉덩방아를 찧었지. 순간,

털썩 주저앉는 나를 황금방석이 얼른 받쳐주었어.

아, 평생 처음 앉아본 황금방석!

그렇게

황금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얼마를 거들먹거리고 있었던가. 문득

곁에서 구린내가 솔솔 올라와 코를 찔렀지.

아불싸!

황금알을 감쌌던 물컹한 과육이 터져

내 엉덩이며 장갑 낀 손까지 적셔버린 것이었어.

왜 황금이 있는 곳마다

이토록 구린 냄새가 진동할까.

바람결에 악취를 날릴 요량으로

가까운 언덕배기로 허위허위 올라갔지.

수령이 무려 팔백이라는, 장렬한 임무를 다 마친

늙은 고독이, 허허로운 늦가을 허공 속으로

폐선(廢船)처럼 흔들리며 떠가고 있었어.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차창룡 2010.12.17. 12:35 pm 

잘 읽었습니다. 수령이 팔백이라는 '늙은 고독'은 무슨 나무였는지요? 팔백 살이라면 고려시대 때 태어난 나무인데, 정말 대단합니다.

명협도인 2010.12.19. 4:13 pm 

내가 사는 원주 반계리라는 동리에 있는 은행나문디, 여덟 아름도 넘을 거요. 아마도.

김애리자 2010.12.22. 12:38 pm 

저도 황금에 눈이 어두워 미끄러진 적 있어요. 그 황금알을 주우려 손을 움켰지요. 와~ 그 냄새 ㅋㅋ
선생님, 건강하시죠? 뵙고 싶네요^^

명협도인 2010.12.23. 9:00 pm 

애리자 시인님, 나 지금 백담사 만해마을에 있어요. 앞의 개여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이젠 썰매 타는 ㅇ아이들도 없더군요. 여기 오시면 같이 미끄럼 탈 수 있는디 ㅎㅎㅎ

김태형 2010.12.30. 1:16 am 

선생님, 아~ 개여울!


홈 목록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48
2014.08.27.
척박한 고원, 수행자보다 거룩한 야크의 ‘공생’
한겨레신문
244
47
2013.09.08.
꽃 먹는 소/고진하 인도시집 [1]
문예중앙
468
46
2012.03.15.
너 부재의 향기를 하모니카로 불다 [3]
미발표
464
45
2012.02.25.
태양 사원 [2]
미발표
424
44
2012.02.22.
퐁디쉐리의 사이클론 [2]
미발표
541
43
2012.02.20.
모자 [2]
미발표
407
42
2012.02.19.
뉘실꼬? [5]
미발표
416
41
2012.02.10.
우물 [2]
394
40
2012.01.25.
꽃 공양 [9]
미발표
453
39
2012.01.12.
꽃 먹는 소 [4]
미발표
491
38
2011.07.28.
대문 [3]
문상사상 8월호
481
37
2011.06.25.
폭염 속에서 [6]
미발표
442
36
2011.03.28.
봄의 첫 문장 [3]
서정시학 여름호 발표
610
35
2011.03.20.
흑소 [1]
515
34
2011.02.02.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6]
현대문학 6월호 발표
636
33
2011.02.01.
오리무중 [1]
문학세계 여름호 발표
428
32
2011.01.20.
새한테 욕먹다 [4]
520
31
2011.01.15.
갈치가 산을 오른다 [1]
미발표
456
30
2011.01.07.
첫 눈의 시 [1]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480
29
2011.01.05.
코딱지 [4]
시집 <거룩한 낭비> 수록
561
28
2010.12.31.
숫눈의 꼭두새벽을 기다리며 [2]
현대시학 3월호
470
27
2010.12.30.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서 [5]
시와 환상 여름호
505
2010.12.07.
황금방석 [5]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520
25
2010.12.04.
불멸의 조각 [2]
유심 1-2월호 발표
471
24
2010.10.19.
시인의 영혼을 믿어야 한다 [1]
미발표
449
23
2010.10.06.
죽기 좋은 날 [1]
503
22
2010.10.06.
허수아비 [6]
418
21
2010.10.05.
자귀나무 [1]
미발표
417
20
2010.09.11.
닭의 하안거 [2]
현대시학 3월호
495
19
2010.09.11.
낡은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가이그포스트
658
18
2010.09.09.
노천카페 [5]
미발표
534
17
2010.08.26.
부들 [2]
문학사상
584
16
2010.08.07.
차도르 [2]
강원작가 2010년호
510
15
2010.08.06.
귀신을 볼 나이에 소를 보다 [4]
강원작가 2010년호
548
14
2010.08.06.
노천 이발소 [4]
문학세계 여름호 발표
511
13
2010.08.03.
석불의 맨발에 입 맞추다 [7]
유심 1-2월호 발표
527
12
2010.08.03.
Neem-님나무 [2]
미발표
663
11
2010.08.02.
붉은 깃발 [1]
미발표
529
10
2010.08.01.
먼, 야무나 강 [5]
유심 1-2월호 발표
664
9
2010.07.31.
食 經 [1]
미발표
500
8
2010.07.31.
그리운 나타라자 [5]
미빌표
608
7
2010.07.31.
소똥 다라니 [2]
미발표
531
6
2010.07.15.
에그 모닝 [2]
가이드포스트 8월호
634
5
2010.03.22.
그대 나날의 삶이 성소(聖所)인 것을 [4]
가이드포스트 4월호
704
4
2010.02.20.
Neem [5]
미발표
676
3
2010.02.17.
그대 영혼의 산정(山頂)이 까마득해도 [2]
가이드포스트 2010. 2.
790
2
2010.02.17.
책, 자유로운 정신의 돛 [2]
문학사상 2010. 1.
712
1
2010.02.17.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을 누리라 [6]
가이드포스트 2010. 1.
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