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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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
詩牧  

코딱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려다

버튼에 붙어 있는 누런 코딱지를 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뻔뻔한 짓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5층 강당에서 내리면

눈 빠지도록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성스러움과 폭력에 대한 강의를 할 예정이었는데,

제기랄, 오늘은

코딱지를 주제로 얘기를 풀어볼까.

일테면 코딱지의 폭력! 에 대해.

그 동안 누군가의 몸으로 존재했을

코딱지,

콧속을 들락날락하는

우주의 뜨거운 숨결을 쬐며

딱딱하게 말라붙었을 코딱지.

한데 어느 짓궂은 장난꾸러기가

제 몸에서 막 분리된 코딱지를

대명천지 드넓은 세상 다 놔두고

여기다 붙여 놓은 것일까.

난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끈적거리는 코딱지를 닦아낸 뒤 버튼을 꾹 누른다,

이제 곧 강의실에 들어가면

뻔뻔한 낯짝을 감추고 지상을 배회하며

아무데나 코딱지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코딱지의 폭력!에 대해

그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는 재미있다며 킬킬거리지만

뒤로는 별 코딱지 같은 선생도 다 있다며 수군거릴 테니까.



(시집 <거룩한 낭비> 수록)

                       

김애리자 2011.01.06. 12:57 am 

와~ 역 발상의 재미있는 좋은 시네요. ~ 정말 그랬을것 같애요 ㅋㅋ

명협도인 2011.01.06. 8:34 am 

이러다 코딱지 시인이라 불리는 거 아니것나 모르것네. 새해 복 많이 지으시소. 애리자 시인!

차창룡 2011.01.07. 6:33 pm 

재미있습니다. 마지막 반전이 특히 좋습니다. 말씀 안 하시길 잘하셨습니다. 말씀하셨으면 이 시도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명협도인 2011.01.07. 7:21 pm 

잦은 스님의 외출이 좋소. 보내준 인도 영화 잘 보았다오. 추위가 좀 풀리면 한 번 봅시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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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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