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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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의 시
詩牧  

첫 눈의 시

 

 

꽃사슴 농장 가는 길목 허름한 농가 마당에

늙은 사내 눈부신 은빛 도끼를 휘두르며

참나무 장작을 쪼개고 있다

털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의 입과 코에서는

연신 흰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벌써 두어 달 전 창작 공간에 들어와 있으나

숫눈 같은 파지(破紙)만 계속 쌓이고

답답한 맘 삭히려 자주 이 골짜기를 걷곤 하는데,

무뎌진 언어의 도끼날을

어떻게 벼리고 벼려야

침묵뿐인 통나무의 입을 쩍, 열리게 할 것인가.

 

시푸른 절벽에 아슬아슬 뿌리를 내리고 선

키 작은 침엽수들을 보면

이 따위 절망쯤이야 순 엄살에 불과하지만

가로 뛰고 세로 뛰며 모험의 날을 세우는

내 시의 열망도

깃털처럼 가벼운 사치로 치부될 테지만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흉작뿐인 노동을

난 오늘도 탁 접어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혹한으로 꽝꽝 언 침묵의 통나무 속으로

은빛 도끼의 새 길을 내는 사내처럼

첫눈의 시를, 시의 첫눈을, 지상 가득 뿌리고 싶어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차창룡 2011.01.09. 9:46 am 

새해에는 "첫눈의 시를, 시의 첫눈을, 지상 가득" 뿌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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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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