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464
흑소
詩牧  

흑소

 

호숫가엔

흑소 한 분이 좌정해 계시었다.

툭 불거진 혹이 하늘로 솟구친

흑소 옆에서 순례자들이

호수 너머 사원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경배할 때

흑소도 경배를 받으시는 것 같았다.

초록바람이 불어

호숫물이 일렁이면

물 속 사원도 일렁이고

흑소의 뿔도 일렁이시었다.

멈춤을 모르고 달려온 사람들이

멈춰 서서

물결 위에 일렁이는 사원을 바라볼 때

흑소는 좌정한 채

큰 눈망울만 멀뚱멀뚱거리실 뿐.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

떠돌고 떠돌고 떠돌던 사람들이

미혹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호수 주위를 서성일 때

흑소는 좌정한 채

큰 눈망울 지그시 감고 계실 뿐.

느닷없이 소나기 쏟아져

젖은 사람들이

가없는 지평선 위로 하나둘 사라져 가면

잠이 깬 흑소도

어슬렁어슬렁

지평선 위로 걸음을 옮기시었다.


                       

보물섬 2011.03.24. 3:00 am 

저도 흑소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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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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