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668
책, 자유로운 정신의 돛
명협도인  


책, 자유로운 정신의 돛

 

 

우리가 책을 읽거나 쓰는 것은 무언가를 낳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닐는지요. 무언가를, 싱싱하고 새로운 그 무언가를 낳으려면 그 태(胎)가 젊어야겠지요. 또한 태의 젊음과 더불어 가임(可姙) 욕구도 지니고 있어야겠지요. 내가 좋아하는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신은 항시 그런 욕구를 지니고 계신다고, 결코 늙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젊음’을 지니고 계신다고, 그래서 그분은 언제나 ‘분만용 침대에 누워 계신다’고 갈파했습니다.

 

나는 운 좋게도 대학시절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만났습니다. 까뮈와 사르트르, 키에르케고르와 카프카 같은 실존주의자들에게 경도되어 있던 내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만남으로써, 뿌연 안개 속 같은 삶에 대한 회의로 가득한 사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그의 글들은 언제나 늙거나 쇠하지도 않는 신처럼 팔팔한 영적 젊음의 향기를 갈무리하고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글들에 매혹당한 까닭입니다. 그는 자신을 시인이라 일컫지 않았지만, 그의 글들에는 시적 향취가 묻어 있었고, 그의 심오한 사상은 바다보다 깊고 광활하여 나는 내 영적 욕구의 닻을 그에게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나는 문학과 종교의 경계 사이에서 그네 뛰듯 살아왔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종교적 관념들을 문학의 언어로 형상화하려 노력했고, 나를 매혹시키는 문학적 이미지들에 종교의 숨결을 불어넣으려 몸부림쳐 왔습니다. 이러한 나의 지향에 엑카르트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 프란체스코 같은 영적 대가의 저작들은 시시때때로 큰 힘을 보태주었지요. 나는 사유의 폭이 넓지 못하고 깊이가 얕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몰입할 수 없었고, 또한 사유의 폭과 깊이를 지니더라도 그 표현양식이 단조로운 그런 작품들에도 빠져들 수 없었습니다. 물론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상가들의 경우,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지요. 문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으뜸의 가르침[종교]과 맞닿아 있다면, 그것을 표현하려 할 때, 문학적 양식을 채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삶의 추(錘)가 종교적 관심으로 기울 때는 문학에서 멀어질 때도 있었지요.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시를 짓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시를 짓는 것만큼 나쁜 것도 없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내장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씻는 것과 같다.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이 말처럼 나 역시 시를 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 즉 존재의 궁극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지상의 표현양식인 문학의 언어는 힘을 잃고 맙니다. 궁극의 존재와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언어는 죽게 마련이고, 시는 ‘이별에서 싹트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루미의 이런 정직한 고백에 매혹되었고, 최근에는 침묵을 한껏 품은 그의 시를 종종 읽고 있습니다. 그는 ‘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노래할 시를 읊을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그것 역시 자기 안에 현존하는 ‘신성한 원본’(神)과 하나 되고자 하는 갈망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육체만을 편드는 이 세상, 요즘 들어, 나는 이 세상이 무척 낯섭니다. 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둔세주의자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살며 그마나 ‘신성한 원본(原本)’을 간직할 수 있는 방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내가 문학적 표현양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문학인들 영원한 것이겠습니까. 문학이 아니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그런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요, 그것마저도 벗어버려야 할 집착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종교 역시 지상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상의 어떤 것도 불변, 불멸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아침에도 늦은 햇살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폭설로 덮인 뒷산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산이라는 책’을 읽으러 말입니다. 서가에 꽂힌 책만 책이겠습니까. 하여간 털장화를 신고 천천히 미끄러운 산길을 올라가는데, 사람의 발자국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적설 20cm쯤은 쌓인 듯싶은 눈길, 짐승들의 발자국만 무수히 찍혀 있었습니다. 고라니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산 중턱쯤 올라 소나무 군락으로 들어섰는데, 소나무들 사이로 무수한 고라니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엊그제 딸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서며 배낭에 넣어가지고 와서 소나무 숲에 놓아둔 고구마와 시래기는 고라니가 다 물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폭설로 굶어죽을까 하는 연민이 일어 가져다 놓아두었었지요. 나는 짐승들의 각박하기 짝이 없는 생존을 조금이나마 거들어 준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고라니의 길, 그 길 위에 인간의 길도 포개져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산의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이런 문자를 여읜 책이 있기에 문자로 된 책이 살아 꿈틀거리는 책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이테를 더할수록 문자를 여읜 책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문자를 여읜 책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또한 문자로 된 책 때문임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며 읽어온 책 가운데는 위에서 말한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잘랄루딘 루미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 외에도 <죄와 벌>의 도스토예프스키, <희랍인 조르바>와 <성 프란체스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작가들의 책입니다. 최근 몇 년간은 인도의 고전인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 같은 사상서들에 내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타의 경전들처럼 존재의 궁극의 문제에 천착하기에 딱딱하고 읽기는 쉽지 않지만, 문학적 이미지와 상징이 풍부하여 나의 상상력을 쫄아들지 않게 해주며, 언어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을 오래 지니도록 부추겨줍니다.

 

하여간 이런 고전들은 문자로 된 것이지만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사유의 바다로 안내해 줍니다. 문자가 사람을 부자유하게 하는 덫이 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의 돛이 되는 그런 책이 좋습니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내 문학적 행위가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걸 늘 명심하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세상을 걸어가면서, 나는 내 문학적 행위가 외향적 가치에서 내향적 가치로 안내하는 영적 이정표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이 세계에 속하는 적이 없이, 언제나 우리를 저 너머, 다른 땅으로, 다른 하늘로, 다른 진실로 데려가는’ 시의 본질을 지상의 뭇 동무들과 늘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바람 역시 내가 읽어온 숱한 책을 통해 지니게 된 것처럼 내가 쓰는 글들도 그런 자극을 나누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창조의 여명은 우리가 이런 의식의 젊음을 사랑하고 잘 가꾸어나갈 때 순간순간 밝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학사상 2010. 1.)

                       

은기사 2010.02.18. 10:48 pm 

  고라니 발자국을 보고 '고라니의 길'을 연상하시는 선생님... 정말 멋지세요.

명협도인 2010.02.18. 11:08 pm 

눈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 꽃잎처럼 이뻐요, 물론 '환영'의 꽃 같은 거지만...... 오늘도 고라니 로드에 다녀왔는데, 눈이 발목을 웃돌아 푹푹 빠졌지요...


홈 목록 글쓰기 이전글 다음글


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48
2014.08.27.
척박한 고원, 수행자보다 거룩한 야크의 ‘공생’
한겨레신문
201
47
2013.09.08.
꽃 먹는 소/고진하 인도시집 [1]
문예중앙
384
46
2012.03.15.
너 부재의 향기를 하모니카로 불다 [3]
미발표
411
45
2012.02.25.
태양 사원 [2]
미발표
377
44
2012.02.22.
퐁디쉐리의 사이클론 [2]
미발표
398
43
2012.02.20.
모자 [2]
미발표
366
42
2012.02.19.
뉘실꼬? [5]
미발표
362
41
2012.02.10.
우물 [2]
349
40
2012.01.25.
꽃 공양 [9]
미발표
409
39
2012.01.12.
꽃 먹는 소 [4]
미발표
444
38
2011.07.28.
대문 [3]
문상사상 8월호
408
37
2011.06.25.
폭염 속에서 [6]
미발표
393
36
2011.03.28.
봄의 첫 문장 [3]
서정시학 여름호 발표
432
35
2011.03.20.
흑소 [1]
377
34
2011.02.02.
새가 울면 시를 짓지 않는다 [6]
현대문학 6월호 발표
507
33
2011.02.01.
오리무중 [1]
문학세계 여름호 발표
387
32
2011.01.20.
새한테 욕먹다 [4]
475
31
2011.01.15.
갈치가 산을 오른다 [1]
미발표
409
30
2011.01.07.
첫 눈의 시 [1]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444
29
2011.01.05.
코딱지 [4]
시집 <거룩한 낭비> 수록
404
28
2010.12.31.
숫눈의 꼭두새벽을 기다리며 [2]
현대시학 3월호
430
27
2010.12.30.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서 [5]
시와 환상 여름호
436
26
2010.12.07.
황금방석 [5]
시와 환상 여름호 발표
472
25
2010.12.04.
불멸의 조각 [2]
유심 1-2월호 발표
427
24
2010.10.19.
시인의 영혼을 믿어야 한다 [1]
미발표
409
23
2010.10.06.
죽기 좋은 날 [1]
463
22
2010.10.06.
허수아비 [6]
377
21
2010.10.05.
자귀나무 [1]
미발표
383
20
2010.09.11.
닭의 하안거 [2]
현대시학 3월호
455
19
2010.09.11.
낡은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가이그포스트
546
18
2010.09.09.
노천카페 [5]
미발표
479
17
2010.08.26.
부들 [2]
문학사상
543
16
2010.08.07.
차도르 [2]
강원작가 2010년호
463
15
2010.08.06.
귀신을 볼 나이에 소를 보다 [4]
강원작가 2010년호
507
14
2010.08.06.
노천 이발소 [4]
문학세계 여름호 발표
468
13
2010.08.03.
석불의 맨발에 입 맞추다 [7]
유심 1-2월호 발표
483
12
2010.08.03.
Neem-님나무 [2]
미발표
615
11
2010.08.02.
붉은 깃발 [1]
미발표
480
10
2010.08.01.
먼, 야무나 강 [5]
유심 1-2월호 발표
513
9
2010.07.31.
食 經 [1]
미발표
453
8
2010.07.31.
그리운 나타라자 [5]
미빌표
566
7
2010.07.31.
소똥 다라니 [2]
미발표
486
6
2010.07.15.
에그 모닝 [2]
가이드포스트 8월호
590
5
2010.03.22.
그대 나날의 삶이 성소(聖所)인 것을 [4]
가이드포스트 4월호
629
4
2010.02.20.
Neem [5]
미발표
626
3
2010.02.17.
그대 영혼의 산정(山頂)이 까마득해도 [2]
가이드포스트 2010. 2.
650
2010.02.17.
책, 자유로운 정신의 돛 [2]
문학사상 2010. 1.
669
1
2010.02.17.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을 누리라 [6]
가이드포스트 2010. 1.
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