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산전수전"

646
그대 영혼의 산정(山頂)이 까마득해도
명협도인  

그대 영혼의 산정(山頂)이 까마득해도

 

 

흰눈에 덮인 산봉우리는 신령스럽다.

지난밤 잔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밤새 온 천지가 새하얀 설국(雪國)으로 바뀌었다. 폭설이 세상을 평정해버린 것. 높은 산과 들판, 마을의 지붕 빛깔이 온통 단색으로 바뀌고,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랑스러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등 만물의 차별성이 사라져버렸다. 이런 무차별적인 평정 앞에서 나는 조물주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무한한 평온을 느낀다.

 

정원으로 나가 보니, 헐벗은 나무들마다 눈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들도 소복소복 눈이 쌓여 두어 뼘은 키가 자란 듯싶다. 마을 고샅길에는 개들이 나와 눈밭을 나뒹굴며 겅중겅중 뛰고 난리법석이다. 뛰노는 천진들을 보니 나도 동심이 꿈틀거린다. 철부지 아이들 마냥 눈덩이를 굴리고 또 굴려 눈사람이라도 만들어볼까. 하지만 어른 체면을 구길 수 없어 마음을 접고 호젓한 산행에 나선다.

 

가벼운 산행이지만 털장화를 꺼내 신었다. 집 뒤로 오르는 산길은 쌓인 눈이 발목을 웃돌고 사람 지난 자취라곤 없다. 발을 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나는 소리가 정겹고 상큼하다. 구부러진 산모롱이를 돌아가는데, 물푸레나무 군락에서 갑자기 장끼 한 쌍이 푸드득! 날아오른다. 내 발소리에 놀란 모양이다. 장끼를 보니, 폭설 때문에 굶주리는 산짐승들도 있을 듯싶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면, 묵은 쌀이라도 몇 줌 가져다가 가까운 숲에 뿌려 주어야지!

 

그리고 또 문득 떠오르는 얼굴. 분주하고 소란한 마음 가라앉히러 강원도 오지의 한 수도원으로 기도하러 떠난 후배목사의 해맑은 얼굴. 그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오색딱따구리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 고목나무를 부리로 찍느라 딱딱거리듯이 후배도 하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수도원 찬마루에 엎드려 바닥을 두드리고 있을까. 그래서 값없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고요와 한적을 누리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에 잠겨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큰 소나무 둥치에 기대 서 있는데, 이심전심이랄까 허리춤에 찬 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 신호가 띠리릭 울린다. 열어 보니, 성속(聖俗)을 오락가락하는 문자들이 잔 눈송이들처럼 떠 있다.

 

“설경이 기가 막혀요, 형님! 그런데 제 마음을 괴롭히는 정욕, 명예욕, 영웅심을 어쩜 좋을까요?”

 

어, 이 친구, 맘에 쏙 드네. 신학도 시절에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후배의 솔직한 표현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대개 성직에 몸 담은 이들은 에고가 강해 자신의 삶의 그늘 드러내기를 꺼려하지 않던가. 자기 삶의 그늘을 거침없이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은 대체로 건강한 사람이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성자로 추앙 받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도 한 때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어두운 그늘 속에 있는 버려진 사람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헌신한 수녀님은, 만일 자신이 성자가 된다면 ‘어둠의 성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던가. 하여간 나는 후배의 그런 솔직함이 맘에 들어 곧 짧은 답신을 날렸다.

 

“J 목사,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세나. 샬롬!”

 

아무리 성의(聖衣)를 몸에 두르고 사는 사람이라도 어찌 세상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수도원 같은 성소에 들었다고 금세 사라지겠는가. 영적인 성취는 한무릎공부로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문득 오래 전에 읽은, 사막 교부시대의 한 젊은 수도자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수도생활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한 젊은이가 늙은 교부(敎父)를 찾아갔다. 그가 찾아온 연유를 털어놓자, 스승이 젊은 수도자에게 물었다.

 

“수도자가 된지 얼마나 되었는가?”

“7년이옵니다.”

 

“7년이라?”

 

젊은 수도승의 대답을 듣고 스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수도자로서 법의를 걸친 지 70년이 되었으나 아직 단 하루도 평온한 적이 없다네. 그런데 자네는 겨우 7년으로 벌써 평안을 갖고 싶다구?”

 

사실 나 역시 마음의 조급증이 일어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상기하곤 했다. 결국 이 교부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조급하게 이룬 영적인 성취는 ‘사춘기적 영성’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 보통 신앙인들이 무슨 부흥회 같은 곳을 다녀오면 금세 뭐라도 된 듯 으쓱대며 호들갑을 떠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그런 행태는 화덕에 올려놓은 양은냄비 속의 짤짤 끓는 물과도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어른의 영성’을 지니라며 이렇게 충고한다.

 

“성령의 불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영혼의 성장을 위해 서서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단번에 타서 없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람이 천년을 살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사람이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서서히 붑니다.”

 

하나님의 배려가 얼마나 세심하신가. 단번에 불에 타 없어질까 봐 서서히 불을 지피시는 성령! 그렇다, 영적인 성장은 더디고 더뎌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바울 성인도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빌 3:14)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을 다 내려와 다시 올려다 본 산봉우리, 여전히 눈부시다. 그리고 까마득하다. 내가 올라야 할 영혼의 산봉우리 또한 까마득하다. 하지만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이 나직이 타이르신다. 서두르지도 말고, 그렇다고 목표를 놓치지도 말라고!

 

 

 

 

 



(가이드포스트 2010. 2.)

                       

차창룡 2010.02.19. 8:03 pm 

드디어 오셨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늦게(새로) 연재를 시작하시는 분 것을 맨 위로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김애리자 2010.07.29. 11:08 pm 

배고픈 산 짐승 미물에게도 사랑을 주시는마음, '내려가면 묵은 쌀 몇줌이라도 뿌려줘야지'~ 하나님의 배려.사랑,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한 것 아닐까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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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 시인.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우주배꼽」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으며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아주 특별한 1분」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등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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